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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파일럿 Oct 26. 2021

조종사가 조종사 나오는 드라마를 볼 때

이 글은 저는 꼰대가 아니에요! 이건 건강한 고집이라구요! 라고 외치며 광화문 어느 1층 카페에서 추운 날씨에도 고집스럽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며 정신 승리하는 어느 부기장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평소에 드라마를 볼 때 고증에 대해 그리 엄격한 편이 아니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브리저튼'에서 연회 중 최신 팝송이 클래식으로 편곡되어 연주된다거나, 한국 드라마에서 외국인 역할로 나온 배우가 한국어로 대사를 하는 장면을 볼 때 드라마의 흐름상 큰 방해가 없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연출이 시청자를 배려해준다는 생각이 들어 더 좋아 보일 때도 있고, 브리저튼에 나온 클래식 버전 팝송은 그 노래가 너무 좋아 한동안 그 노래들만 찾아 들은 적도 있을 정도다.


이렇게 세상을 너그럽고 너른한 마음으로 대하며, 모든 변화에 열린 마음으로 건강하게 받아들일 것만 같았던 이 가여운 중생도 차마 그러지 못하는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내가 직업적으로 몸 담고 있는 분야였다. 나의 직업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면 세상 그 누구보다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자세로 임하고 있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 있는 'Into the night(어둠 속으로)'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드라마의 대부분이 비행기 내에서 진행이 되는 만큼 기내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조종사나 항공사가 주가 되어 진행되는 항공드라마가 아니었다. 굉장히 참신한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간절하고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로 가득한 SF 드라마였다.


하지만 이미 그 드라마를 시청하는 나의 눈빛은 마치, 금지옥엽 키운 딸이 남자 친구라고 데려온 어디 시커먼 남자를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랄까. 그에 버금가는 눈빛으로 팔짱을 낀 채 '비행기가 나온다고?'의 마인드를 장착한 뒤 1화를 재생한 나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눈에 밟히는 장면들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1. 하이재커가 들어와서 닫혀있는 조종실 문을 여는데 너무 손쉽게 열린다.

-> 승객들이 탑승하기 시작하면 조종실 문은 닫고 잠금 상태로 둔다. 그래서 그렇게 바깥에서 손쉽게 열 수가 없다. 하지만 이건 우리나라 절차이지 유럽이나 미국 어떤 항공사들은 승객들이 탑승할 때 조종실 문을 잠금 하지 않은 채 열어 두는 곳도 있다고 들었으니, 너그럽게 마음을 먹는다면 넘어갈 수 있다.


2. 부기장이 하이재커와 투닥거리다가 왼손을 다쳐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이 상태로는 비행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 드라마에 나온 상처 정도로는 이륙을 위해서 Throttle(엔진 파워를 조절하는 레버)을 조작하는데 '저 정도 부상이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는 정도의 상처로 보였지만, 하이재커가 탑승한 상태로 비행기를 이륙시키지 않으려는 부기장의 어떤 하얀 거짓말이자 기지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이것도 감독의 센스라 생각하며 이해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그래, 그럴 수 있어. 드라마니까 하고 넘어가는데


3. 비행기가 push back을 하는데 앞에 push back을 도와주는 pushback car가 없다.

-> 아, 드디어 팔짱 낀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스스로 후진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게이트에 주기된 비행기의 앞바퀴를 콱 물고 후진을 도와주는 pushback car의 도움으로 비행기는 후진한다. 프로펠러 비행기 같은 경우는 프로펠러 블레이드 날을 역으로 하여 reverse 상태로 파워를 넣어서 후진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고, 제트 엔진 비행기도 reverser를 사용하여 후진을 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고르지 못한 공기의 흐름이 엔진으로 빨려 들어가서 compressor stall(쉽게 말해 엔진에서 펑!)이라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비행기는 스스로 후진하지 않는다

 

4. 말도 없이 pushback 해 놓고 관제사에게 이륙은 요청을 하는 장면.

-> 허가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비행기를 pushback 시켜 놓고, 이륙은 허가를 요청하라는 저 친절한 하이재커 같으니라구. 관제사가 죽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넣은 장면 같은데 많이 부자연스럽다. 예컨대, 아들이 엄마 카드 들고 말없이 가출했다가 편의점에서 결제하기 전 엄마에게 전화해서 "엄마! 나 말없이 가출은 했지만 라면이랑 김밥 해서 2,700원어치 결제해도 돼?"와 같은 상황이랄까.


이 모든 장면은 무려 드라마의 제목인 'into the night'이라는 글자가 영상에 새겨지기도 전, 초반 11분 34초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나의 직업적 고집을 하늘 끝까지 폭발시킨 건 그 후 ND(navigation display)라고 불리는 계기판, 즉 비행기의 위치를 나타내 주는 지도에 움직이는 비행기가 드라마 내내 똑같은 자리에 있다고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자동차로 따지면 누군가가 내 자동차를 탈취하여 100km를 이동했는데도 자동차에 붙어있는 내비게이션에는 자동차의 위치가 출발할 때 우리 집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쯤 되니 드는 생각,


'이건 드라마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데?'


사실 그 계기판에서 비행기가 움직이고 있든 말든 드라마를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심지어 비행기가 이동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시청자는 그 계기판에서까지 비행기가 움직이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무려 인류의 생존이 걸린 사투라는 어떤 거창하고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드라마에서 나는 고작 비행기 세트장 구석탱이 한켠에 붙어있는 계기판에서 배경화면이 움직이는지 안 움직이는지 보고 있었다니.


하지만 이런 가여운 꼰대도 위로와 공감은 필요한 법, 조금은 누그러진 팔짱을 풀고 친구에게 연락을 하여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고 눈물로 읍소하니,


"너 꼰대 아니야. 나도 그래, 내 분야 나오면 디테일하게 보게 되고 괜히 꼬투리 잡고 싶어 지고 그렇지. 누구나 그렇지 않나?"


아, 친구의 말을 듣고 확신이 생겼다.


이 놈 이거 꼰대구나.

예끼 이놈. 꼰대였구나.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라,

꼰대 옆엔 꼰대들이 있다.


나의 고집은 건강한 고집이 아닌 꼰대였던 것이다.


아, 이래서는 안 된다.

변화하는 세상에 외로운 꼰대로 남을 순 없다.

나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하며 드라마를 완주했고, 드라마는 정말 재미있었다.

내용과 아이디어가 신선했고 사실 무엇보다 비행기를 주제로 한 드라마라면 무엇이든 반가우니까.


그러니 부디 항공과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팔짱을 풀고 엄격하지 않고 근엄하지 않고 진지하지 않은 자세로 볼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물론 영화 '플라이트'에서 조종사 역할로 나오는 덴젤 워싱턴이 호텔방에서 나올 때부터 선글라스 끼고 나오는 장면 같은 것만 좀 없으면 좋겠지만, 괜찮다.


그리고 물론 드라마 '부탁해요 캡틴'에서 랜딩하고 부기장이랑 관제사랑 삿대질하면서 싸우는 장면처럼 현실에선 말도 안 되는 장면 좀 안 나왔으면 좋겠지만, 괜찮다


그리고 정말 물론 영화,


아아, 자꾸 스스로 이렇게 괜찮은 것들을 나열하다가는 일주일이 모자랄 것 같으니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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