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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탈수되어 종이처럼 바싹 말라

by 현진현

물을 마실 수 있어 좋았다. 실연의 경우는 물을 마시기도 힘들다지. 출판업을 사업으로 하기로 했던 게 떠올라 물을 마셨다. 내게 가장 가까운 일, 그나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물색해 왔다. 어쩌면 스무 살 무렵부터 내내 물색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광고 카피도 글을 써서 먹고사는 일이긴 하니까 글이 위주인 출판을 한다는 게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다.

아내의 의견을 청취하고 싶었..., 사실은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전술했다시피 또다시 아내의 애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관두었다.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 아내가 잠들 시간을 기다려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오후에 미열을 털어내면서 일어났다. 둘째가 만들어준 독특한 요리를 먹고서 시를 쓰는 후배를 만나서 원고 이야기를 했다. 또 디자이너 선배를 함께 만나서 책의 디자인을 논의했다. 재미있다. 화병이 약간 수그러든다. 그런데 우리는 단 한 번도 출판을 경험한 적이 없다. 물어 물어 나름의 편집회의를 한 것이다. 또 회의를 하면서도 종이값을 벌기 위해, 사실은 아이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저렴한 전쟁터로 취업할 계획을 떠올렸다. 책은 무슨 돈으로 만드나... 고민이 꼬리를 물었다. 누군가의 말을 끊고 크라우드펀딩 이야기를 했다.

편집 미팅을 위해 모인 셋은 모두 실업자였다. 아마추어 시인은 고료 따위 필요 없다고 말했고, 나는 업계의 일반적인 대우 밖에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시인의 원고는 풋풋해서 지금 나이의 시인으로 인지하도록 편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디자이너 선배는 책 표지 디자인에 대해 내 의견을 구했다. 나는 찾아보겠노라고, 사실은 아내의 부재에서 벗어나겠노라고 대답했다. 아니 수입의 출처가 되는 업무의 부재에서 벗어나겠노라고 대답했다.

나는 본래 허무의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아내가 그렇게 말해주었다. 실업 전보다 실업 후에 종종 충동이 일어났다. 대체 직장이 뭐라고. 그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충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희망으로 간주할 것도 많은데, 지금이 최악인데, 남들은 이보다 더한 절망도 일상으로 가졌는데... 나는 왜...?

잠이 오지 않는다. 새벽 5시 알람을 맞춰놓았지만 자정을 넘어 새벽 2시쯤 되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출판사가 펴낼 각개 시리즈의 매니페스토를 썼다. 어깨가 찢어지듯 아프다. 술은 마시지 않기로 했다. 술을 마시면 열이 40도까지 치솟을지 모른다. 어쩌면 취업을 위해 건강검진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세 번의 밤을 지나면 아내가 돌아온다. 아내를 보면 무너질지 모른다. 나는 세상에서 아내와, 가족을 위한 생활비 이 두 가지만 신경 쓰고 싶다. 그들이 행복해지고 나도 그 행복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서서히 탈수되어 종이처럼 바싹 말라 가루처럼 부서지고 싶다. 가루는 바람에 쓸려 날아간다. 나는 그 어떤 '흔(痕)'도 남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상상을 한다.

실업의 괴로운 면만 이야기했다. 괴로운 면만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내일부터는 희망의 일기를 써 보겠다고 또 다른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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