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살면 살아진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by 현진현

요즘 드라마에 그런 카피가 나오더라. '살면 살아진다'라고. 왜 이런 말들이 깊은 절망을 깨부수지 못할까. 하지만 지나고 보면 '살면 살아진다'는 정도의 말은 카피가 아니라 진리도 아니라 그야말로 '시간이 증명하는 인생'이다. '지나고 봐야'하니까 무엇이든 잃어버리지 말자. 잃어버림과 잊힘 사이에 있는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면 부디 우리 잃어버리지 말자.

석 달 푹 쉬고 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서, 열심히 열심히 구직 사이트를 들여다봤다. 적은 월급이어도 일자리를 구하고 출판과 투트랙으로 벌어보자. 벌어서는 외려 넘치게 아내 손에 생활비를 쥐어주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밝은 세계, 동네카페로 와서 실업자 일기를 쓰고 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큰애가 허락한 냉동밥을 녹이는데 다니던 회사의 대표가 전화를 해왔다. '살아있나?'로 시작하는 그 과장된 억양에서... 아, 회사는 곧 문을 닫겠구나 직감했다. 안부전화라고 했다. 퇴직금 얘기는 하지 못했다. 연말정산 환급금 얘기도 하지 못했다. 이번 달 수입은 0원인데 왜, 말을 못 했다.

형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누나의 시댁이 영덕에 있어서 안부 좀 물어보라고 했다. 누나의 시댁은 다행히 화마로부터 아주 살짝 비켜나 있었던 모양이다. 내일 비가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누나에게 이야기했다. 형님은 상해에서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중국의 기타는 쓸 만한 것이 있는지 내게 물었다. 내 기타를 사는 건 어떠냐고 되물었다. 싸게 주겠다며.

출판을 제대로 하겠다고 생각하고 나니 할 일이 많아졌다. 물론 제대로 익히는 과정은 첫 책을 내면서부터일 것이다. 디자인이 완료되지 않았으니까 이참에 나는 편집자가 쓴 에디터 이야기, 온라인 서점 MD가 쓴 책 파는 이야기, 그리고 몇 권의 시집을 빌려와 독파하고 있다. 다른 할 일도 많다. 청탁해 놓은 원고를 기다리고, 내 다음 원고도 써야 했다. 자기소개서도 써야 하고, 이력서도 손봐야 하고, 경력증명서도 신청해두어야 했다. 우리 출판사는 광고회사 출신들답게 단행본을 '시리즈'로 준비한다. 시리즈는 캠페인이고, 캠페인엔 '철학'이 필요하다. 그 철학은 책의 정체성인 동시에 책의 필요가치까지 설명해내야 한다. 책의 본질은 사유라고? 책의 본질은 '읽힘'이다. 읽힘이 판매로 이어져야만 한다.

수없이 절망해 본 나는, 출판으로 다시 절망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진 않는다. 실업자 신세에서 초보 에디터가 되는 그때(책의 마케팅이 본 궤도에 오르는 시점)까지의 그 공허함(쉽게, 실업자 신분)이 두려울 뿐이다. 공허함을 독서로 채운다. 허기진 독서인데 이 허기가 앎의 허기이긴 하지만 외려 삶의 허기에 가깝다.

삶의 허기를 독서로 채운다니. 책은 영양분이 없다. 몸무게는 계속 내려갔다.

여하튼 우리는 실용서를 고민했다. 실용을 위한 실용서? 그런 것은 세상에 없다. 모든 실용은 모든 인문학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우리는 실용서를 인문학적으로 고민했다. 살면 살아진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2화서서히 탈수되어 종이처럼 바싹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