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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도입부는 샤워젤 같아

by 현진현

바흐의 도입부, 특히 반주는 마치 샤워젤 같았다. 오르간 반주들은 특히 더 한데... 인생 별 거 아니라고 가르치듯 현실감 없는 천국 같은 폴리포니를 들려준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장모님 별세하신 지 며칠 만인가, 열여드레만에 돌아왔다. 아내가 돌아오는 동안에 나는 이미 불안을 떨치고 정상화(?)된 것 같다. 수첩을 펴서 일정을 정리하고 많은 것을 처리했다. 공과금과 보험료와 환경개선부담금 같은 것들... 그리고 나름의 기도를 했다. 화마가 마을을 덮쳤다. 사돈 어르신이 계신 누나의 시댁이 있는 영덕이 몹시 걱정스러웠다.

우리가 만드는 책이 어쩌면 조금은 안전한 시장으로 진입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리즈의 콘셉트를 서술했다. 출판사의 이름은 '작은정원'이다. 정원에선 식물성 책을 키운다. 책을 따면 머리에 꽂거나 가슴에 품고 다닐 수 있다. 박 선배는 이것을 무빙북이라고 했다. 책은 그냥 자라지 않아서 잘 가꾸어야만 한다. 민석의 '서툰시'나 내가 쓴 원고 '음악소설집'을 이 '가벼운 책' 시리즈로 출판할 것이다. 그리고 필름카메라를 찾아서 필름을 사서는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이 사진들을 향해 카피를 썼다. 이 책은 제본을 다르게 하고, 종이도 두꺼운 걸 쓰기로 했다. 사이즈는, 박 선배의 디자인이 끝나면 정하기로 했고.

안될 게 뻔하지만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같은 것도 써 두었다. 대략 거짓이 20% 섞인 자기소개서... 20%는 누구를 소개한 걸까. 나의 워너비를? 여하튼 아내가 돌아왔다. 나는 이제 생각이란 것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따라나서지 않더라도 강을 따라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를 타겠지. 아내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도 여러 장의 레코드를 들었다. 투렉의 바흐를 들었고 키스 자렛을 들었고 반주 도입부가 샤워젤 같은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도 들었다. 역시 바흐는 반주까지 좋다. 무반주 소나타도 좋은데 그건 셰링의 연주나 크레머의 것이 좋다.

아내는 자신의 책상 앞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책을 읽고 있다. 나는 오늘 세탁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다. 어젯밤에는 온 집안의 머리카락을 모두 끈끈이테이프로 잡아냈다. 그리고 두 번의 요리를 했다. 둘째가 하굣길에 포도를 사다 주어서 같이 먹었다. 첫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은 집중력이 소진된 것만 같다. 하긴, 어젯밤엔 한숨도 못 잤다. 돌아온 아내를 보는 순간 온몸의 맥이 풀리면서 역설적으로 피가 돌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본다는 것, 실업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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