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기술을 통한

by 현진현

저는 농아인 야구선수 이윤희입니다
[타격음을 듣지 못하면 경기에서 3m 이상 뒤쳐진다.]
들리지 않는 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연습하면 돼요
농아인 야구 국가대표를 꿈꾸는 윤희 씨와 선수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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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악극을 듣는 이유는 중독될 정도의 절절한 이야기 때문이다. 속속들이 베어 들어있는 멜로디와 그 의미, 그리고 그 전설로부터 기인한 운치와 여운이 굉장한 피델리티를 가지고 있다. 흔히 ‘밤의 음악’으로 불리는 브람스의 네 개 악장들을 대비해 보면, 바그너라면 하나의 음이거나 악극 전체거나. - 그러니까 전체를 관통하는 빛줄기가 있는 동시에 모든 음들이 유기적이다. 물론 브람스는 브람스만의 고전적인 無窮動을 가지고 있다.


콘텐츠의 길이는 지면 광고처럼 무한정이거나 방송광고처럼 ‘저스트’로 딱 떨어지는 것이 다였다가... 요즘의 유튜브처럼 어쩌면 작품에 맞는 길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작품에 맞는 길이’는 실재하지 않는다. 범박하게 봐서, 길이는 시청자에 맞게 정해진다. 시청자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영상물들과 영상광고들의 길이는 아주 다양해진다. 세분화해보면, ‘작품에 맞는 길이’와 ‘시청자에게 맞는 길이’는 늘 뒤섞여 있는데 전자는 간접적인 광고 영상, 후자는 일반적인 광고 영상으로 대략 나눌 수 있다.

물론 ‘작품에 맞는 길이’는 창작자의 자의적인 길이에 치우치기도 한다.

하지만 거의 모든 예술은 창작자보다는 ‘창작자의 관점에서 보는 향유자들의 기대’로 채워진다.

말하자면 ‘니즈(needs)’에 따라 생겨난다. 예술을 과하게 해체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고? 그것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겠지.



모차르트의 교향곡과 베토벤 교향곡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본의 일부 평론가들이 베토벤의 심포니를 ‘윤리적’이라고 규정하나 보다. (여기저기서 읽은 이야기이고, 80년대 이전의 분위기라 추정될 뿐 출처를 확인하지 못한다. ‘윤리적’일 뿐 ‘윤리’는 아니니까 명확한 규정은 아니다.) 그런 비평적 규정의 배경 중 하나는 악기의 총주다.

모차르트보다 늘어난 악기의 숫자, 그리고 팀파니 같은 큰 소리를 내는 악기의 추가. 많은 악기가 같은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규범으로 느껴지는 윤리성으로 치닫는 건가. 그저 미적 관점으로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윤리라기 보다는 이른바 윤리미 같은 것.


모차르트가 몇십 명 정도를 모아놓고 발표했던 피아노 협주곡의 시대와 베토벤의 시대는 달랐다. 베토벤의 시대에는 흔히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상공 계층이 크게 성장한다. ‘귀족만 음악 들으라는 법 있소?’,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연주회장으로 몰려들었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 연주회장은 커질 수밖에 없다. 드넓어져 버린 연주회장을 채우려고 베토벤은 모차르트와 다른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더 많은 악기와 더 큰 소리가 나는 악기들을 위한 심포니를 작곡해야만 했다. 당연히 악상도 변해갔을 것이다. 따라서 길이도 길어졌다.

이 불편한지 안 불편한지 모를 교향악적 진실이 말하는 것은 뒤틀린 천재론이다. 우리가 진보하는 것인지 변화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지만 ‘모두를 위한 변화’에는 늘 그 ‘작용’만큼이나 ‘부작용’이 뒤따른다.


손끝으로 유성이를 보는 저는 시각장애인 엄마입니다

터치만 하면 다 되는 세상은 저에겐 오히려 더 어려워졌고

느리고 서툴러 당황할 때도 많지만 유성이가 행복해하는 걸 느끼면

‘나도 잘할 수 있구나’ 하게 됩니다.

유성아, 웃고 있지?

“클로바, 30분 후에 유성이 약 먹이게 알려줘!”

“클로바, 실내 모드 켜달라고 해!”

“우와~ 말로 하니까 편하다.”

고마워, 나에게 와줘서

유플러스와 네이버 클로바가 함께 만든

유플러스 우리집 AI를 시각장애인 가정에 지원합니다.


이 카피는, 새로운 기술인 A.I.(Artificial Intelligence)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그 이전 기술에 대해 묻고 있다.


터치만 하면 다 되는 세상’은 진보였을까?


KakaoTalk_Photo_2018-11-18-10-47-11.jpeg Göteborg,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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