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감독이 소설로 쓴 책을 읽은 김에 동명의 영화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키키 키린(Kiki Kirin)이 최근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다보다 더 깊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6
원제가 <海よりもまだ深く>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제목인 <태풍이 지나가고>보다 영화에 더 들어맞다.(당연한 건가?) 영어로는 <After the Storm>이어서, <태풍이 지나가고>로 정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사실상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로써 결말은 아버지의 사랑을 살아남은 자식이 깨닫는다는 것. 두꺼우며 짙은 마카롱의 외피 속에 정말이지 한 톨 한 톨 씹히는 솔직한 단맛들이 텍스쳐로 펼쳐진다. 아버지의 관조와 이해를, 아들도 따라야 한다. 주위의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종으로 횡으로 모두 마찬가지다. 아내도, 어머니도, 아들의 아들도.
이해로서의 상실감
‘상실로써의 이해’는 쉽지 않은 세계관이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선뜻 풀어헤칠 수 있다. 하지만 입 속에 들어간 상실감을 혀끝으로 조금씩 조금씩 굴리다 보면 한참을 씁쓸하다가 비로소 뭉클해진다.
사랑만으론 살 수 없어, 어른은…
톺아보면, 모든 어른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어릴 적엔 사랑만으로 살 수 있다고 믿어도 좋다, 하는 식이다. 이런 편린들을, 평온해 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느끼지 않을 도리가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일상이니까.
가령 우리는 오늘도 ‘제 마음이 이렇게 드러날 수밖에 없어 미안해요’라는 문구를 마스크팩처럼 얼굴에 붙이고 잠을 청한다. 그렇지만 ‘상실’을 느끼는 감각으로부터 ‘상실감’과 부딪히는 행동을 지나 마침내 ‘현실’을 수용하는 의지까지, 인간은 상실로부터 변화한다. 그런데 그것이 성장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상실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고레에다 감독은 키키 키린을 잃었다.
키키 키린 : 할머니는 바다만큼 깊고 바다보다 깊은 마음을 전하는 매개다. 할머니의 멘트는 모두 리듬을 탄다. 깊어서 그 출렁임이 무게 있는, 그렇다고 해서 잔잔한 물결을 외면하지 않고 품어주는 그런 호흡을 내 쉬는 바다, 그 바다의 ‘때’를 안다고나 할까. 멘트들은 줄지어 꽃이 피듯 연발한다.
Antonín Dvořák : Cello Concerto
Anja Thauer, 1964
곡의 기승전결이라거나 밝음과 어두움이라든가 누구를 위한 노래인지를 단번에 알아버렸다. 안야 타우어는 어린 나이에 죽었다. 그녀의 드로르작은 그녀의 전체 생으로 보자면, 툭 벌어진 무화과 - 그러니까 절정의 노래였다. 그리고 절창이며 사랑의 노래다.
그래서 말인데 상실이란 게 도대체 뭐야? 살면서 익숙해져 버리는 그게 뭐냐고! 혹시 자신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시 회복하고, 상실하며, 회복하는 건 아니냐고?!
요즘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다른 것들로 채워주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 카피라는 생각도 들어온다. ‘마음을 전하는 데’에도 역할을 하는 것이 광고 카피 아닌가 말이지.
요즘 <정관장의 추석 선물 캠페인>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