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그 가능성

by 현진현

한숨 낮잠을 잤는데, 일어나니 코끝이 시큰해진다. 가을이다. 무작정 밖으로 나간다. 그러면서 그래, 詩가 그립다 중얼거리다 급기야는 서점으로 가 진열대 위의 시집들을 몇 권 사든다. 뜨거운 커피를 끓여내고 한 자 한 자, 한 올 한 올 뜨개질하듯 읽어 내린다.



때로는 써놓은 카피를 다듬기 전에 시를 읽는다. 화자를 만나고 화법을 관조하다 보면 시인의 글쓰기 전략을 엿볼 수 있다. 유려한 표현들과 낯선 어휘들을 맛보는 것은 덤이다. 게다가 문학은 삶의 구체성을 가르친다.


감기에 종일을 누웠던 일요일 그대에게 가고 싶은 발걸음 돌려 실상사를 찾았습니다 자정의 실상사는 겨울이 먼저 와 나를 기다리고 천년을 석등으로 선 石工의 살내음 위로 별빛만 속없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상처도 없이 낙엽은 섬돌에 걸려 넘어지고 석탑의 그림자만 희미하게 얼어가는 이 거역 없는 佛心의 뜰 안에 서서 <여기 鐵佛로 支脈을 잡아 새나가는 國運을 막으리라> 정녕 그대를 사랑한 것은 내 생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은빛시린 서리처럼 오랜 세월 말없이 견디는 계절의 눈빛마다 속 졸이며 현상되는 기억을 대웅전 연꽃무늬 문살에 새기다가 사람의 가슴에도 깊이가 있다면 그대보다 멀리있는 그대의 그리움 또한 아득히 잠기겠지요 실상사 긴 담장을 품고 산허리 꽃 피고 눈 내릴 때마다 더러는 못 참아 술값을 치러가며 떠나온 그 자리 여기 실상사 언제는 그립지 않은 시간이 있었냐며 풍경 소리는 바람의 몸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 <실상사에서의 편지>, 신용목(2004)


읽어보고선 마음에 드는(사실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시를 골라 잉크가 번지지 않는 고급 노트에 옮겨 적어 내려 간다. (노트 한 권이 차면 누군가에게 선물하려 했다.) 시의 행들을 그대로 옮기기도 하고 행을 무시하고 줄글로 적어가기도 했다.


무참하게도 나는 좋은 카피를 쓴 일이 없으므로 내가 옮겨 적었던 시들을 특별히 추천하지도 못한다. 다만 시를 읽을 때의 그 ‘되어 봄’은 좋은 공부다.

시란, 한 편 한 편 모두가 인생이기 때문이다.


충남 연기군 남면 상공을
아기 갈매기 네 마리가 눈부신 흰 깃을 펄럭이며
일직선으로 난다
아아, 첫 비상이다.
- <봄>, 이시영(1990)


시를 읽은 직후, 바흐의 평균율 1권의 첫 번째 프렐류드가 눈 앞에 떠올랐다. 일직선은 봄의 역동성보다는 경건함을 웅변하고 어린 새들의 처녀비행은 회화적 심상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림이 음악이 되고 음악이 그림이 되면서 시어는 사라졌다. 이런 공명(共鳴)의 순간을 언젠가는 광고언어로 옮겨보리라 생각한다.


리듬, 그것은 인간의 숨결과도 같아서 알 수 없으되 무궁한 어떤 生인 것만 같다. - 어쩌면 나는 리듬 속에서 인생의 좌우명을 만났다.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 마음 없이 살고 싶다. /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 온 길 갈 길 잃고 헤멜 때 /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 그 흘러내린 자리를 /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 내린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 <쨍한 사랑노래>, 황동규(2003)



시를 읽다 보면 누군가 그리워질 수도 있다. 잔을 들고 시집을 펼친 다음, 잔을 내리고 시집을 덮는다. 혹은, 잔 대신 담배를 들기도 하는데 언제인가 한번, 광고의 시안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시집을 덮고 잔을 들다, 강장백세주


시는 깊다. 저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시원한 한 모금 같을 건데 그렇다고 낙담 말자. 거기에 브랜드와 제품을 동여매자. 인생 얘기라면 당신도 살아가고 있으니 공감할 테지.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분명 당신을 보고 싶어 하고 있다.


‘JR 동해’의 카피다. 치사한 희망이라기보다 카피의 가능성 정도로 생각하자. 당신도 쓰고 싶어 하는 카피가 있잖아. 그것부터 가능성이지.


image13.jpeg 감은사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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