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어제 아내와 함께 서촌에 갔다.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와서 걷다 길을 건너 대림미술관에 갔다. 토드 셀비의 [행복한 나의 집]을 잠시 관람하고 나서 천천히 걸어서 통인시장에 들렀다. 인왕식당에서 소머리국밥을 먹고 [커피공방]인가 하는 커피집을 들어갔다. 거기에서 [경복궁의 봄]블랜드를 드립으로 마셨다. 가을날 마신 봄날의 커피는, 따뜻했다.
커피 한 잔 할까요?
허영만, 2017
오늘 아내의 추천으로 허영만 선생의 [커피 한 잔 할까요?]를 1권부터 5권까지 읽었다. 3권인가 4권을 읽을 때는 자꾸 눈물이 나왔다. 상화도 이야기(섬 이야기)와 치매에 걸린 남편의 르완다 이야기를 읽을 때였다. 읽으면서 예가체프를 두 잔 정도 마셨다. 한 잔은 진하게, 한 잔은 여리게 마셨다.
세상 만물에 사람과 사람들이 들어가 있지 않는 게 있겠냐만 커피는 각별하게 이야깃거리가 많다. 만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역시 봉지커피에 관한 것들이었다. 내 인생 샷이 봉지커피였는지 도대체 무슨 커피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때의 상황은 기억이 난다. 4일 동안의 행군이었지 싶다. 걷고 또 걷고, 잠시 자고 또 걸었다. 군화 속의 발은 짓물러 있었지만 행군 마지막 순간, 동료가 군장을 놓치자 받아 들고 같이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군장 두 개를 양 어깨에 메고 뛰다시피 연병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원들이 오기까지 주저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때 무슨 커피를 마셨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름 잘났다 뻐기며 마셔서 기분이 참 좋았을 것이고 그래서 맛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을 텐데…
언젠가 ‘최고로 맛있는 커피’가 무엇인지는 알았다. 며칠을 참았다가 다시 마시는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허선생님의 만화에서 몇 부분 주목한 것은 ‘바리스타가 가진 커피에 대한 태도’다. ‘카피라이터가 가진 카피에 대한 태도’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러 대목 곱씹으며 보고 읽었다. 한 가지 옮겨본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커피밖에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카피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내가 쓴 카피는 도대체 무엇이 있나요? 자문해 본다. ‘잇몸에 마음 더하기?’ 작품에 나오는 어떤 캐릭터의 말을 빌려서 바꿔보면, 마음이 실리지 않은 카피(혹은 커피)는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면 혹, 요즈음의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 카피는 아닌가요? 토드 셀비의 전시를 보고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 내가 있고, 내가 쓴 카피에 대해 솔직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만 같다. 나는 비겁한 건가? 더 깊이 고민하고 겸손해져야지, 한다. (뭘 좀 칭찬받아야 겸손할 텐데)
허선생님의 만화는 '낭만주의 화풍의 경지'라고 느꼈다. 선생은 커피를 모른다고 하지만 커피와 선생의 만화는 궁합이 잘 맞다. 와인에 대해 [신의 물방울]이 있다면, 커피에 대해서는 이 작품이 있다. - 선생은 커피를 커피 전문가처럼 다루진 않고 굳이 표현하자면 [우리의 음료답게] 다루고 있고, 신의 물방울은 일본 답게(과장스럽게) 다룬다.
선생님~ 잘 보고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