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아내는
미국의 배우 글로리아 그레이엄(Gloria Grahame)은 195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했는데 그 젊은 시절에 아카데미 영화상 조연상을 받았다. 여배우의 삶은 스캔들로 한두 번 더 주목받았지만 그 후 한꺼번에 잊히고 말았다. 그 스캔들이란 남편의 열세 살 먹은 전처소생 아이와 한 침대에 누워있었다는 것. 그로부터 세 번의 이혼을 하고 다시 결혼을 하는데 그 상대가 바로 열세 살이었던 그 아이였다. 그 아이의 아버지, 그러니까 그레이엄의 첫 남편은 <이유 없는 반항>(제목의 신랄함이라니)의 감독이자 '불완전함'에 대한 필름적 표현(누아르라고들 얘기하지)으로 저 멀리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인정받았던 개척자, 니콜라스 레이였다.
그런데 이 여자, 그 소년과도 이혼한 후 유방암으로 죽기 몇 년 전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그는 그레이엄이 한창 활동하던 1952년에야 태어난 피터 터너(Peter Turner)였다. 무진장 연하인 연인이다. 피터 터너는 그레이엄이 죽고 난 후, 그녀와의 만남에 대한 책을 쓰고 ‘Filmstars Don't Die In Liverpool’이란 제목을 붙인다. 그 책을 폴 맥기건이 영화화한다. 그레이엄은 한번 더 주목받게 된 셈이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이라는 이 영화의 한 장면에 실제의 피터 터너가 잠깐 출연한다. 죽어가는 ‘글로’를 부축해 극장을 방문하는 피터. 무대에 선 그 두 사람을 위해, 피터는 의자 두 개를 들고 카메라에 얼굴을 드리운다. 프레임 안에서 과거의 자신과 과거의 연인을 쳐다본다.
Filmstars Don’t Die In Liverpool
Paul McGuigan, 2017
주연의 삶은 추적되지만 조연의 삶은 아무도 추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추적되지도 않는다. 그레이엄은 잠시의 주연을 접어두고 삶과 일을 즐기며 살아갔던 모양이다.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 삶의 끝에 마지막 대사를 뱉어낸다. 로미오와 줄리엣 1막 5장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사랑을 해왔다구?
내 눈이여, 결코 아니라고 부정하라!
오늘 밤까지 난 진짜 아름다운 사람을 본 일이 전혀 없었으니.
나의 단 하나의 사랑이 단 하나뿐인 증오에서 싹트다니!
알지 못하고 만난 것은 너무 일렀고
알고 보니 너무 늦었구나!
가증스런 원수를 사랑해야 하다니,
아, 불길한 사랑의 탄생이여.
이 영화의 상영에 앞서서 장률 감독의 영화 '군산'의 예고편이 나왔다. 리버풀이든 군산이든, 변산이든... 있는 그대로일 것‘만 같은’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모두 흥미롭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1막 5장을 주고받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 카피도 영화처럼 삶의 한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안 익어도 맛있고
잘 익어도 맛있고
푹 익어도 맛있는 김치
사는 것도 나이마다 맛이 있단다
김치는 인생이니까 제대로 깊어야지
- 대한민국 김치 종가집
이런 카피 꽤나 좋지 않은가? (내가 토씨를 살짝 바꿔놓았다.) 들여다보면 ‘삶의 순간들’로부터 출발한다. 하긴 그렇지 않은 카피가 드물겠지만... 사람이 쓰는 사람에 대한 카피니까.
비 오면 노래하고 바람 불면 춤추고
해나면 낮잠 자고 천하태평 놀기만 하는 사탕수수군에게
종달새 아주머니가 걱정스럽게 묻습니다
“너,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잘 자란 사탕수수를 발효하여 만들었습니다
- 발효 미원
그런데 왜 사탕수수군이냐고, 사탕수수양도 훤칠하게 자랐을 텐데. 그래요, 수많은 카피들은 이렇게 인생을 담아낸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읽을 만한 카피가 흔한 것은 또 아닙니다. 책 좀 읽은 사람들의 세계라고 해둡시다.
A Day At The Races
Queen, 1976
인생을 담아내는 그릇을, 우리는 살고 있다.
그릇에 담긴 인생을 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아침나절에는 명백하게, 그 그릇을 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릇을 탈출하고 싶은 인생이기도 하고… 취하지 않은 채 봤더니 담긴 무엇이 아니라 그릇 자체였다는 어떤 인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