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이야기 (2/2)

by 현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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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이 악보를 읽으면 음의 가치가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뇌는 다시 내 양손으로 음가를 옮겨낸다. 낮은 성부와 높은 성부, 내 두 손은 명징한 소리를 기도하며 건반을 누른다. 해머가 현을 때린다. 현의 떨림은 공기에 파장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주파수들이 내 귀를 통해 다시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다시 나의 몸과 마음을 자극한다. 내 마음과 내 머리와 내 손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다. 공기 속으로 음들은 자유롭게 순회하고 있다. 순회하는 음들은 모두 내 것이다.


그해 여름, 나는 해가 뜰 무렵부터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는 열 시 무렵까지 그 방에 있곤 했다. 가끔은 늦은 밤도 좋았다. 하루는 콘서트 무대에 선 양 용기를 내어 피아노 몸체의 덮개를 열고 연주를 해 보았다. 페달을 밟고 코드를 누르는 순간 아주 큰 소리가 났지만 극장의 전력(前歷)으로 어느 정도 방음이 되고 있었던 탓이었을까, 그 방의 문을 두드리거나 열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번의 우스꽝스러운 예외가 있긴 했다. 그 예외란, 늦은 밤 기획팀의 대리 하나가 여자 부장의 가슴을 움켜쥔 채 그 방의 문을 밀치며 뛰어든 일이었다. 어둡지 않았다면 그들은 바로 나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길거리의 네온 조명만 비치고 있던 그 방에서 그들은 서로의 몸을 만져가며 쉬지 않고 입맞춤을 나눌 뿐이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라이터를 켜는 소리에 놀란 그들은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다음,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취한 발걸음을 돌려 방을 나가고 말았다.

그 여름의 막바지 온 세상이 더위에 휩싸인 어느 날 ‘행복해진 나를 발견했다’라고 일기장에 써넣었다. 스타인웨이라는 값비싸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피아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방에 들어서면 마치 수백 명의 관객이 들어찬 명성 높은 콘서트홀의 무대에 올라선 것만 같았다. 가끔 스타인웨이와 나란히 무대 위에 서서 청중의 표정을 여유롭게 돌아보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연주는 점차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바흐를 연주하고 나면 청중은 어김없이 브라보를 외쳐댔다. 커튼콜을 받은 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를 한 음, 또 한 음 느릿느릿 정성 들여 연주하곤 했다. 그런 상상 속에서 나는 그 시절을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나의 어린 피아니스트 시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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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시작했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그만두었다. 나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는 아니었다. 연습에 매진하는 쪽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한 연습 덕분인지 누구에게나 칭찬을 들었고 언론에도 오르내렸다. 그만 둘 무렵에는 국내 최고의 선생으로부터 레슨을 받으며 유학을 앞두고 있었다. 국내에 한정되긴 했지만 크고 작은 몇 개의 콩쿠르에서 우승해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공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나는 콩쿠르에 참여했던 다른 신동들과 달리 점점 더 피아노가 좋아지고 있었다.

나를 피아니스트로 만든 건 아버지의 레코드들이었다. 내가 피아노를 그만두기 직전까지도 아버지는 퇴근길에 중고 레코드를 한 아름 사 오시곤 했다. 그 이름도 찬란한 아르투르 베네디티 미켈란젤리,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밀 길렐스, 클라라 하스킬,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글렌 굴드 ……, 모두 빛나는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내가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은 레코드는 대부분 굴드의 것들이었다. 유학이 결정되던 날엔, 어쩌면 굴드를 직접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내가 굴드를 특히 좋아했던 건 아주 어릴 적 들었던 그의 연주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내가 막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는 이따금 서재의 책상머리에 놓인 카세트 레코더로 음악을 들으셨다. 헨리 맨시니나 폴 모리아가 지휘하는 관현악곡들이 많았을 테지만, 한잔 하시는 날엔 어김없이 빛나는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굴드와 스타인웨이가 빚어내는 소리였다. 그때 이미 굴드만의 독특한 스타카토의 묘미에 익숙해져 버린 건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스물다섯 번째 변주를 예닐곱 번씩 반복해서 듣곤 하셨다. 그 멜로디를 잊을 수 있을까.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클리셰 같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내 방에 놓인 피아노와 거실에 있던 오디오에 빨간딱지가 붙었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날은 레슨이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에도 나는 레슨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 레슨을 해주던 선생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피아노가 없는 집은 좀 어색했지만 내가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쫓기듯 이삿짐을 싸기 전까지 나는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나뒹구는 악보들을 넘겨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피아노를 포기해야 했던 것은 물론이었고, 한동안 그 누구의 연주든 모든 피아노 소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견딜 수가 없었다. 골목 어귀에서 흘러나오는 서투른 솜씨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 것조차 힘겨운 때가 있었다. 피아노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지방의 학교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통학버스에서였다. 나이 지긋한 운전기사가 슈만을 들려주었다. 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버스에서 마지막 학생이 내릴 때까지 미켈란젤리의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기사는 미켈란젤리의 팬이었나 보았다. 다음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기사는 미켈란젤리의 슈만과 드뷔시를 들려주었다. 며칠 뒤 나는 휴대용 CD플레이어와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CD를 살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스무 살 남짓까지의 내게, 음악은 보이지 않는 뼈를 가진 물 같은 것이었다.



7

스타인웨이가 사라졌다.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악보를 가득 안고서 그 방의 문을 열었을 때 스타인웨이는 없었다. 스타인웨이가 있던 자리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먼지가 깔려 있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그 방에서 바흐의 푸가들을 연주했고, 오후에는 집 근처 한 신학대학의 구내에 있는 음악 전문서점에서 바흐의 악보들을 골랐다.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냥 집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스타인웨이가 사라졌다.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오히려 그 크고 무거운 피아노를 어떻게 가져갔을까 하는 의문부터 들었다. 꿈에서 봤던 곳을 꿈에서 깨어나 다시 둘러보는 것만 같았다. 피아노는 어떻게 그 방을 들고 날 수 있었을까? 그 방의 출입문은 터무니없이 작았고 창 또한 아주 작았다. 피아노를 발견했을 땐 그런 의문조차 들지 않았던 것도 이상했다. 그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글렌 굴드와 그의 조율사가 분해를 해서 들고난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짐작을 해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때 내가 그 이상한 사건에 대해서 얼마간의 여유가 있었던 건, 왠지 모르게 피아노가 그 방으로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희망부터 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로부터 며칠 동안을 줄곧 굴드가 연주한 레코드들을 들었다. 어찌 됐든 스타인웨이를 계속 즐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5층의 그 스타인웨이가 그리운 것은 당연했다.

피아노가 사라진 후 그 방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아노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물론, 누군가 사라진 피아노에 대해 말을 꺼낸다든가 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아노는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아침저녁,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 방을 찾아 피아노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피아노가 사라지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건물의 관리인과 1층 화방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피아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또 그동안 피아노를 치워버리진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에 혼자서만 간직했던 피아노의 존재를 김이사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는 5층에 방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5층에 방이 또 하나 있었어? …… 아, 그 창고? 난 안 들어가 봤는데? 거기 뭐가 있었다고?”



8

굴드의 예민함에 비견될 만한, 그의 연주에 대한 청중들의 집요하리만큼 민감한 반응은 그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모든 기간 지속되었다. 토론토 외곽 작은 마을의 눈 덮인 작은 집을 떠나 그만의 피아니즘을 세상에 처음으로 내보였을 때는 물론이고,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예가 자신이 살던 도시의 명성을 넘어섰을 때, 또 노년에 CBS의 스튜디오로 돌아와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을 다시 레코딩 해 추억의 스펙트럼을 진일보시켰을 때에도 사람들은 변함없이 그의 피아니즘에 긴 박수를 보냈다. 게다가 광적인 부류의 팬들은 그의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벌써 그의 연주를 목말라하기도 했다.

굴드는 두 번의 은퇴를 했다. 첫 번째 은퇴는 콘서트 무대에서의 은퇴였다. 굴드는 단호하게 콘서트 무대를 버렸다. 그것은, 청중의 열렬한 호응에 일곱 번의 커튼콜을 받고서도 더 이상의 연주는 정중하게 거절하고야 마는 그의 완고한 제스처와 비슷했다. 굴드의 두 번째 은퇴는 북아메리카에 백 년 만의 추위가 올 것이라 떠들어대던 해의 어느 가을날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콘서트를 그만두는 것에 이어 레코딩마저 그만두는 죽음으로써의 은퇴였다. 완전한 은퇴였을까? 그것은 실패였다. 그의 죽음은 그의 명성을 북미와 유럽을 넘어 남미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까지 알린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때 스타인웨이의 명성도 함께 바다와 산맥을 넘었다.

요컨대 글렌 허버트 굴드(Glenn Herbert Gould)는 1932년 9월 25일 태어나, 1982년 북아메리카의 역사적 추위로 기록된 겨울이 닥쳐오기 전인 10월 4일 세상을 떠났다.



9

미친 듯 두드리다가 다시 흐느끼듯 흘러내리는 내 두 손과, 그 손들을 제어하는 내 이성을 통해 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내 삶을 드러낸다. 그것이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 내 눈앞에는 삶의 의미가 어른거린다. 나, 나의 손, 피아노 건반, 피아노 줄, 소리, 그리고 동향의 공간. 방의 모든 사물은 시간을 틈타 서로를 탐하고 있다. 아! 그런데 나와 세계의 매개가 사라졌다. 내가 표현되는 방식은 상상으로 그칠지라도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


내가 기도했던 연주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나는 나를 둘러싼 일상 속에 머물러 있었으면 될 뿐이었을지도 몰랐다. 어디를 둘러봐도 구원 따위는 없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 삶의 손에 잡히는 형체, 다만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내게 분명했던 것은 오직, 내가 사는 방식이 점점 더 내게 익숙하게 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피아노가 사라졌다는 것, 그것이 반드시 불운한 것은 아니었다. 나빠진 것은 없었다. 나는 감상적인 고민에 빠진 것만 같았다.

며칠간의 짧은 휴가를 내고 좁은 내 아파트로 돌아왔지만 재미없는 TV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거나 이불을 뒤집어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전히 회사로 달려가 스타인웨이의 부재를 다시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심심치 않게 찾아들었을 뿐이었다. 휴가를 하루 남겨 둔 날 정오쯤, 끈질긴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 말이다. 옛 여자 친구였다. 수화기를 든 나는 그 길로 그녀와 길고 긴 잡담에 빠져들고 말았다.



10

나는 가끔 기중기로 굴드의 피아노를 들어 올려 비행기의 조종석에 집어넣는 장면을 상상한다. 검은색 스타인웨이가 삐걱대는 목조 기중기에 매달리면, 머리가 뭉툭한 거대한 여객기는 전투기인 양 조종석의 덮개를 열어젖힌다. 인간의 뇌에 손톱만 한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듯, 기중기는 여객기의 머리에 스타인웨이를 안착시킨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글렌 굴드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것은 내가 본 그의 사진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굴드는 하얀 눈밭에 서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이었지만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굴드 뒤로 보이는 광활한 눈밭에 눈이 빨간 토끼들이 뛰어다니는 장면이 눈에 그려지곤 했다. 굴드는 사진처럼 충분히 고독했다. 그래서 슬펐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서른다섯 해 동안 지녔던 그런 슬픔과는 달랐다. 하기는 굴드가 연주한 모차르트는 늘 악평에 시달렸다. 평론가들은 굴드만의 곡 해석과 타건이 오직 바흐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굴드는 모차르트식의 슬픔과 대면할 필요가 없었다. 굴드 또한 모차르트처럼 음표 뒤로 무엇인가를 감추었지만 그것은 슬픔을 넘어서는 다른 성질의 무엇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굴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제외하고는 같은 곡을 두 번 이상 레코딩하지 않았다. 굴드는 그런 식으로 연주를 하는 자신의 개성을 깊이 존중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연주를 표현해주는 스타인웨이의 개성 또한 존중했다. 나아가 두 개의 중첩된 개성을 받아들이는 청중의 개성까지도 굴드는 존중했다. 그리고 굴드는, 자신 역시 한 명의 청중이었으므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연주를 사랑했다. 그에게 있어 연주는 자신이 살아가는 삶 자체였고, 그 소리를 만드는 과정은 자신이 살아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적어도 굴드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방식 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했다. 말하자면 그의 예술은 그의 삶에 불과했다.



11

피아노가 사라지고 해가 바뀌어 다시 초여름이 되었을 무렵, 나는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 방을 얻어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내 방 안에는 풀지 못한 이삿짐이 박스채로 가득했는데 그 속에 악보 따위는 없었다. 악보들을 어디에다 둔 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해가 무척이나 드셌던 그즈음의 어느 날 아침, 나는 우연히 그리고 오랜만에 5층의 그 방 앞을 지나게 되었다. 무심코 걸음을 옮기던 나는 그 방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았고 누군가 그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척이나 놀랐지만 걸음을 돌려 문 앞으로 다가간 나는, 스타인웨이가 있던 그 자리에 머리가 벗어진 한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도 늙어버려 겨우 얼굴을 알아 볼만한 글렌 굴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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