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한 자리에 앉으세요

카피 다시 쓰기 No. 31

by 현진현

L이니셜을 쓰는(나 혼자 정함) PD님을 만나, 요즘 유행일까 싶은 1차는 네가 쏘고 2차는 내가 쏘는(L PD님의 연배가 더 높습니다.ㅎ) 타입의 술자리를 파하고, 은근히 좋아하는 3030번 좌석버스(종점이 TBWA앞이라... 늘 앉아서 히히)를 타고 - 아, 술은 강남역에서 마셨어요. -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는 왔는데 집이 좌식으로 변해있다. 그러니까 거실의 테이블과 의자가... 의자가 없다. 테이블은 낮아졌다. (소파는 베란다로 옮겨졌다.)
낮은 테이블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나는 지금 테이블에 올리지는 못하고 무르팍에 랩탑을 두고 쓰고 있습니다. 왜 좌식일까, 좀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지만 여전히 요가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물어볼 수가 없다. 요가는 육체적인 운동 겸 정신적인 운동이라 내가 그녀의 이 심오한 리듬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
블루투스로 라벨을 틀어뒀다. 이 콘체르토의 두 번째 악장은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악상을 보여준다. 좌식에서는 물론 엉덩이가 아파서 우울은커녕 슬프기만 할 뿐이다.


편하신 자리에 앉으세요


2차로 들렀던 '생활 맥주'에서의 종업원 말씀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술이 취해서 이제 본 건가?) 내 작업 도구들과 의자는 베란다에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카피를 쓰고 그림을 배치할 수 있도록 아내는 내 PC 두 가지와 아이패드를 옮겨 놓았다. 베란다로 꺼지라는 말인가?!
아내는 요가를 마쳤지만 내가 이 좌식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이 사태를 완전히 재미없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난 영원히 묻지 않을 거다. '왜 우리 집 거실이 좌식으로 바뀌었는지요?'라고 묻지 않을 거야.
라벨의 콘체르토는 2악장으로 접어들었다. 사실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롤랑 바르트의 그 유명한 문구, '나는 그 사람이 아파요'에 매달렸다. 이 카피를 가지고, 나만의 언어로 뭔가를 써 내려가고 싶었다. 그러지를 못했다. 나는 바르트만큼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사람'... 그 사람이 아픈지 잘 사는지 어떤지... 그 사람을 떠올리기도 힘이 들어서, 술어를 붙이는 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라벨은 3악장으로 접어들고... 아내는 이 좌식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이, "해주야~ 이 닦고 자~"를 외쳤다. 나는 해주가 아니기 때문에 벌써 닦았어, 하고 얘기해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여전히 대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거실의 스피커는 거의 바닥에 깔려 있어서 이 좌식에서는 내 귀에 날아와 꽂힌다, 아르투르 베네디티 미켈란젤리의 라벨이 말이다.
아내의 좌식 배치를 따질 것도 없이 나는 그저 '편한 자리를 찾아 앉으면 그만'이다. 괜히 아내를 들쑤셔서는 아니된다.
슬슬 술도 깨 가서 말인데 사람분들이 말입니다. 사는 게 뭐라고, 참 생각들이 많습니다. 저도 포함해서 말이죠. 이렇게 저렇게 순간들이 반갑고 재미나서 저는 이렇도 좋고 저래도 좋은데...
또 만나요, 우리.
그러나 저러나 '그 사람'님, 연락 한번 합시다.절대 마음으로 연락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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