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 그 영화를 내가 누구와 본 거지? 싶은 때가 있다. 검색해보면 1998년 12월이나 1월에 구로사와 아키라의 '가케무샤'를 봤다. 당시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었고 '하나비'가 개봉된 다음 '가케무샤'가 개봉했다. 극장이 대구 만경관이었던 것도 생생하다. 포스터와 극장의 거대한 그림 간판도 얼핏 기억에 남아있다. 지금껏 나는 내 누나와 '가케무샤'를 봤다고 생각해왔는데 오늘 문득, 그건 누나와 본 '사랑과 영혼' 때문에 헷갈렸던 걸 알게 되었다. 그럼 '가케무샤'는 대체 누구와 본 걸까? 짐작 가는 인물로 당시의 여자 친구 정도가 떠오르는데, 아침에 물어봐야겠다. - 그때의 여자 친구, 즉 지금의 아내는 아니라고 대답해주었다. '가케무샤'란 영화는 기억도 못하고 있었다.
영화 '가케무샤'는 제목 그대로 '영무사(그림자 무사)'를 다룬다. - 아, 대체 누구와 봤을까? 틀림없이 여자인데...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에 대한 모티브가 마치 내 삶의 모티브처럼 무거워진다. 가케무샤에는 '스와 고료닌'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그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기억에 남았다. - 같이 봤던 여자는 도대체... - 닮았기 때문에 다케다 신겐의 가케무샤로 영입된 이 주인공은, 다케다 신겐이 죽고 나서 진본 없는 가케무샤로 활약하게 된다.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진격하지 않고 산처럼 버티고 있으라'는 사실상 다케다 신겐의 유언일 뿐이다. 가케무샤의 이 멘트는, 다케다 신겐의 가케무샤가 다케다 신겐이 되어버리는 순간, 즉 진짜가 아닌 영혼이 진짜화 되는 순간을 드러내는 기표로 영화에 작용한다. 영화에서 신겐의 아들이 다급하게 보고한다. 영주님! 적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그때, 신겐의 몸을 가진 가케무샤는 산은 움직이지 않음을 조건 반사와 무조건 반사 사이에서 선언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전투에서 대패할 때까지 몸과 마음 모두 다케다 신겐으로 살아간다. - '닮은 외형', '그에 따르는 역할'이 본질을 만들어낸다는 이 영화의 설정에서 이 카피는 내러티브 상 결정적이다.
그렇든 말든 나는 대체 누구와 이 영화를 본 걸까? 인간 군상을 조감하고 내려와 클로즈업해 보는 이 영화의 맥락과 그 미덕은 내게 별 의미가 없다. 어쩌면 내게는, '기억나지 않는 어떤 여자와 본 영화' 정도가 이 영화가 가진 영화적 의미다.
굳이 저 카피의 의미를 파고들자면 - 가케무샤의 영혼 동화 같은 동화적 발상을 삭제해버리면 -
인간은 누구나 산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