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 간다!"
전화기 너머 형은 운전을 하면서 대답했다. 순간, 나는 손맛을 떠올렸다. 그리고 1996년의 그녀를 떠올렸다.
“오늘은 또 무얼 건졌어요?”
그 시절, 그녀는 도서관 열람실 안쪽 대학원생들이 모여있는 방에서 하루 종일 셰익스피어를 뒤졌다. 그런 그녀는 공부를 하면서 발견하거나 터득하거나 깨닫는 것을 ‘건져 올리기’ 또는 '낚기"라고 불렀다. 그냥 그런가 보다 어림짐작만 했었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지식의 바다에서 싱싱한 지식을 발견하고 건져 올리는 채집과 낚시야말로 근본적인 공부방법이라는 것. 지금에야 보이스피싱 같은 것이 있어서 듣기에 좀 그렇긴 한데 그땐 반복해서 듣다 보니 뭔가 경쾌해졌다.
"오늘은 뭘 낚았어?"
이렇게 반말에다 목적어를 한 음절로 물어올 때가 특히 듣기에 좋았다. 단위가 오늘 하루였으니 무심하면서도 챙기게 마련이었다. 아무것도 못 낚아도 기분이 좋았다. 빈 배로 귀항하는 어부처럼 내일 새벽의 출항을 생각하면서 웃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낚시는 담백했다.
건져 올린 것은 회를 쳤다. 그러니까, 책을 읽어 얻은 지식은 당장의 과제나 강의 중의 질문으로 활용했다. - 나는 뭐 그런 학생이었다. 말 좀 하라고 질문 좀 하라고 보채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딱하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회를 칠 수 없는 것들, 즉 깨달은 것들은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런 것들은, 체화시켰다고 믿고 싶다. 때로는 몸으로 실천하기도 했는데 가령, 니체가 '우리의 글쓰기용 도구는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 데에 한 몫하지.'라고 했을 땐 학교의 구내서점으로 갔다. 가서는 저렴한 만년필을 구해오기도 했고, 어떻게든 노트북 PC를 구해보려고 애를 썼다.
무엇보다 낚아 올릴 때의 쾌감이 좋았다. 낚시꾼들은 그것을 손맛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내게는 여러 면에서 어부의 쾌감과 닮았던 것 같다. 낚시꾼이야 취미와 취향으로 손맛을 느끼겠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어부처럼 생계를 걱정하고 모쪼록 더 많은 고기들을 낚으려고 하면서 손맛의 쾌감보다는 이득의 쾌감 같은 걸 추구했던 것 같다. 하기는 어부의 '낚아 올림'을 나는 모른다. 다큐멘터리 같은 것에서 보면 3킬로그램은 됨직한 삼치 한 마리가 물 밖으로 낚아 올려져 배의 갑판에 스스로를 내동댕이친다. - 분명 그렇게 보였다. 그 내동댕이의 순간, 생에의 애착을 놓고 마는 자아의 파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면 거짓말일까? '거대한 문장'을 낚아 올렸을 때의 감각 말이다. 한 마리의 삼치가 아니라 세상의 삼치는 모두 내 것이 되어버리는 마법을 맛보는 것만 같았다. '리오타르'를 읽고 난 뒤, 나는 리포트에 플라톤과 리오타르의 대화를 써 내려갔다.
"칸트를 면전에 두고 칸트를 비판해 봐."
그녀는 물론 이런 과격한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그때의 내 감각이라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내겐 칸트 선생님께 꿀밤 한 대 맞을 일도 없었다.
"칸트를 넘어서려면 칸트를 읽어서는 안 돼. 칸트를 읽으면 칸트에 동화되어 버린단 말이야. 그러니 목차만 봐."
이런 헛소리를 하고 다녔던 기억은 난다.
그 시절부터 25년 동안 매일을 목표로 뭔가를 낚아 올리려고 했던 것 같다. 매일 건져 올리는 삶에서 하루 이틀, 일이 년 거른다고 뭐가 문제 될 건 또 없다. 내일 또 뭔가를 건지면 되니까.
오랜만에 '그녀의 낚시'가 생각나서 신난다. 뭐야, 초심이라는 건가?
"가이!(그녀는 나를 이렇게 불렀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 거야?"
"돈은 별로 못 벌거고... 죽을 때까지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제대로 내다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