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자살'은 사안을 결정지었다. 그게 다다. 너무 간단해서 소스라칠 정도다. - 시민들은 슬픔 속에서 침묵하면서 그를 추도할 수밖에 없다.
어제 일요일 저녁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아들 셋 딸 둘 형제의 셋째가 인터뷰를 한다.
"우리 큰형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큰형에게 기댔죠. 가령 5천 원이 필요하면 큰형한테 얘길 해요. 그러면 형님이 그러세요. 아... 네가 돈이 필요한 걸 내가 미처 몰랐다. 네가 얘기할 때까지 몰라서 미안하다고... 그러는 분이 저희 큰형이세요."
셋째는 말끝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중에 큰형이 치매에 걸리거나 해서 무슨 짓을 하시더라도 다 받아들이고 영원히 형님을 믿고 따를 거예요."
숙명이었을까?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것이었을까?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일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무려 여덟 군데, 광고 회사를 옮겨 다녔다. 첫 회사만 7년 정도, 두 번째가 4년, 그다음부터는 점점 줄어서 1년을 다니는 회사도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문득, 회사가 있는 위치가 회사의 스타일에 난 회사의 스타일이 회사의 위치를 닮아간다고 생각했다. 가령 청담동 가구거리에 있는 회사와 논현동 가구거리에 있는 회사는, 가구 상점이 있는 거리에 있는 건 같았지만 회사의 스타일은 확연하게 달랐다. 청담동에 있는 회사는 그 동네를 닮아갔고 논현동에 있는 회사는 논현동을 닮아가는 식이었다.
마지막 회사는 삼성동에 있었다. 회사는 임대료가 비싼 삼성동스러웠다. 그러니까... 속 빈 강정 같았다. 사표를 세 번 내고서야 바이 바이.
끝에서 두 번째 회사는 논현동 가구거리에 있는 작지만 알찬 회사. 잘 만든 가구처럼 사람들의 개성 있는 재능들을 잘 결합시켰다. 을지병원 사거리로 사옥을 옮긴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동네의 주변 빌딩들처럼 하늘 높이 솟구칠 것 같다. 끝에서 세 번째 회사는 분당에 있었다. 쌍림동에서 분당으로, 분당에서 다시 삼성동으로 옮겼다. 뭔지 모르게 그 회사에 앉아있으면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았다. 끝에서 네 번째 회사는 반포에 있다. 요즘에도 업무를 위해 아주 까끔 방문한다. 반포의 끝없이 밀리는 차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막혀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섯 번째 회사는 처음으로 CD의 직책을 맡았던 곳인데 삼릉공원을 두르는 길에 있었다. 왕릉처럼 계절의 기억들을 진하게 묻히는 회사였다. 여섯 번째 회사는 사무실을 빈번하게 옮겨 다녔는데 내가 다니는 와중에도 한 번 이사를 했다. 한 번 남산 아래로 간 적도 있었는데 내가 다니는 동안은 청담동과 청담동이었다. 전위적이지만 어떤 면에서 설익고 어려웠다. 끝에서 일곱 번째 회사는 강남의 큰 네거리에 있었는데 위치답게 정신없이 사람들이 들고났다.
끝에서 여덟 번째 회사, 그러니까 나의 첫 광고회사, 내게 강북 판타지를 심어준 곳은 이태원에 있었다. 지금의 이태원은 레트로 핫한 곳이 되었지만 그때의 이태원은 서울 속 오지일 뿐이었다. 강북 판타지란, 강북에 있으면 내면이 고요해지고 업무도 잘된다는 나만의 착각. 큰 회사인데도 트렌드를 잘 캐치하는 것으로 봐서 독특한 감각들이 파고드는 이태원을 실감할 수 있다. 이태원은 그러니까 조선시대 병자란 이후 외인의 씨를 밴 여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고, 또 효수터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내가 다니던 시절에도 여러 풍파를 겪었다. 광고회사의 핵심 정신인 크리에이티브와 풍파의 화학적 결합이 이러기도 하고 저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얼기설기 가져다 붙인 것 같긴 한데 어쩌면, 당연하게도, 사무실의 위치가 회사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