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소설집
D.960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의 모차르트(W. Mozart)는 유명했고 나는 그 모차르트를 즐겨 듣고서 깊은 감명을 받고는 했다. 그러면서 자랐다. 자라서 서른이 되었다.
서른이 된 해의 3월, 그러니까 그 금요일의 퇴근길에서 나는 그만 난생처음으로 하스킬의 모차르트가 아닌 하스킬의 슈베르트를 깊게 들었다. 연주도 연주였지만 하스킬이 짚어 낸 그 소리가 툭하니 가슴을 찔러왔는데 그건 정말 마음속 모든 것을 지워버릴 만큼 아름다웠다.
슈베르트(F. Schubert)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도이치 넘버 960번. 1951년 파리의 한 스튜디오에서의 하스킬. 그녀는 어제 있었던 일을 들려주듯 수더분하게 건반을 눌렀다.
안식과도 같은 음향을 들려주었던 하스킬의 그 시디(CD)는 참 인상 깊다.
스물셋, 제대하던 해였고 늦겨울이었다. 복학을 앞두었던 나는 마냥 집에서 뒹굴대는 게 좋았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미래를 걱정하던 누나의 종용을 이기지 못해 새벽부터 영어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영어회화반이라는 것이 해도 뜨기 전에 좁은 강의실에 모여 앉아 외국인이 불러주는 말들을 반복해서 따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게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든 나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누나 몰래 학원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누나의 눈 때문에 알록달록한 영어 교본을 챙겨 들고 새벽이면 꼭꼭 집을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는데, 찬 기운이 누그러진 새벽바람 탓이었던지 음악이 몹시 듣고 싶은 거였다. 나는 몇 시간이나 시내를 서성이면서 대형 레코드 가게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청음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곳에서 하스킬의 그 시디 모음집을 보았다. 곱게 나이 든 하스킬의 초상이 담긴 재킷이 마음에 들었고, 매끄러우면서도 두툼한 재질의 종이박스 속에 띄엄띄엄 엘피(LP)로 듣던 연주들은 물론 엘피에도 없던 흔치 않은 음원들까지 차곡차곡 들어 있는 것이 좋았다. 꼭 가지고 싶었고 두고두고 듣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주머니엔 누나에게서 받은 다음 달 수강료가 들어 있었다.
그렇게 가지게 되었던 것이 바로 필립스사에서 나온 ‘하스킬 더 레거시 볼륨 3 솔로 레퍼토리(Haskil The Legacy Volume Ⅲ Solo Repertoire)’였다. 그 시디 모음집을 사들고 온 날 밤, 나는 그것을 듣지 않고도 행복했다.
석 장의 시디였다. 스카를라티(D. Scarlatti)와 모차르트, 라벨(M. Ravel)이 든 첫 번째 시디와 슈만(R. Schumann)이 수록되어 있던 두 번째 시디는 끼고 살다시피 했다. 그 두 장의 시디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였던지 베토벤(L. Beethoven)과 슈베르트를 담은 세 번째 시디는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그 세 번째 시디를 우연히 듣게 된 날이 시디를 가진 그날로부터 무려 7년이 지난 어느 금요일 퇴근길이었다. 출퇴근길에 들으려고 차에 가져다 두었던 열댓 장의 시디들 속에 하스킬의 그 모음집이 있었다.
하스킬의 슈베르트를 깊게 들은 그날 밤에, 나는 나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네 인생은 하스킬의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아름다우냐?’
나는 그 모음집의 해설서를 몇 번이고 곱씹듯 읽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인생역정의 험난함만큼이나 아름다웠던 하스킬의 사진 몇 장이 연대기에 따라 들어 있었다.
어린 하스킬의 눈에서는 귀기(鬼氣)가 느껴졌다. 루마니아 태생의 유태인이었던 하스킬의 그 귀기는 세포 경화증이라는 불운에 의해 위축되고 나치(Nazis)에 의해 꺾이다 만년에 이르러 다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스킬은, 콘서트를 열기 위해 들른 브뤼셀의 한 기차역 계단에서 실족하는 바람에 숨지고 만다. 하스킬의 나이 예순다섯이었다.
하스킬은 만만찮게 기구한 삶을 살았던 예술가였고, 나는 그런 하스킬의 모차르트로부터 위로받아 젊은 날의 아린 상처들을 겪어낸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계기란, 하스킬의 슈베르트뿐이었다. 그 금요일의 밤에 나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다음 달, 봄 냄새가 봄동의 속살 같이 익었을 무렵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때는 온 세상 경제가 퍽이나 잘 굴러가서 내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외에는 별달리 걱정이 없었다.
누나는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부터 완강하게 반대했다. 누나와의 수차례 다툼 끝에 내 결심을 실행에 옮겼을 땐 회사를 그만둔 지 5개월이나 지난 후였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브람스 레코드는 그렇게 탄생했다.
브람스 레코드에서는 시디도 팔고 엘피도 판다. 새것도 팔고 중고도 판다. 가게에서도 팔고 인터넷에서도 판다. 클래시컬도 팔고 재즈도 판다. 레코드도 팔고 책도 판다. 책이란 몇 권의 시집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집을 열댓 권쯤 가져다 놓고 판다. 슬픈 시들은 잘 나간다. 여자 직장인이나 여대생이라도 들르면 나는 곧잘 시집을 팔아넘긴다. 그중 잘 나갔던 시집은 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로 기억한다. 아, 그리고 얼마 되진 않지만 국악음반도 판다. 지금도 젊은 소리꾼들이 부른 눈대목이나 명인들의 산조를 담은 시디들이 스무 장 남짓 구비되어 있다.
브람스 레코드라는 이름은 내가 지은 것이다. ‘하스킬 레코드’라고 지을 뻔했다. 그런데 누나가 반대했다.
“하스킬이라니……, 킬이라는 게 그다지 어감이 좋지 않구나.”
누나는 하스킬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하스킬의 이름인 ‘클라라’를 써서 ‘클라라 레코드’로 이름 지었다면 누나가 선뜻 동의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별 후회가 없다. ‘클라라’는 끝내 브람스(J. Brahms)의 사랑을 뿌리친 클라라 슈만을 연상시켰으니까.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이 우정으로 대체될 수 있단 말인가. 슈만이 자신의 음악만큼이나 그럴듯한 남자였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순정파 브람스가 좋기도 했고 브람스의 음악도 즐겨 들었지만 무엇보다 브람스라는 이름의 어감이 좋았다.
그 이름 탓만은 아니었겠지만 브람스 레코드는 개업 이후 번창해서 지금은 온라인에서도 이름난 음반 쇼핑몰이 되어 있다.
덧니 소녀
당대에 손꼽히는 천재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하스킬은 죽기 얼마 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콘서트용 그랜드 피아노를 장만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개업하자마자 값비싼 오디오를 가게에 들여놓았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그 오디오세트는 가게의 한쪽 모퉁이에서 매혹적이고도 편안한 소리들을 만들어주었다. 뜻하지 않게 마음이라도 차오르는 날이면 틈이 난 내 감정들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었다고 할까, 내게는 달콤했던 어린 날들의 추억과도 같은 존재였다. 훌륭했던 만큼 다루기 까다로웠던 그 기기들은 지금 여기에 없다. 어떤 날은 그 소리가 그립다. 덧니 소녀가 그리운 만큼이다. 딱 그만큼이다.
나는 가끔 브람스 레코드의 홈페이지에 마련해놓은 자유게시판에 몇 마디를 끼적인다. 라디오를 듣다 말고 그 감흥을 적어내는 것이다.
당신은 이국의 언어를 알고 있습니까? 세상에는 정말 많은 언어가 있다고요.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은 연주자가 아니라 이국의 언어에 능통한 30대 초반의 남자랍니다. 그는 토요일 밤에 음악을 들려줍니다. 많은 기억들이 서로 엇갈립니다. 하나의 언어 속에서도 엇갈립니다. 종잡을 수 없는 죄악들과 슬픔들, 그리고 새로운 언어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라디오에서 말합니다. 이별을 잘하면 아름다운 사랑을 가질 수 있다고요. 하지만 이별을 잘하기가 어디 쉽나요? 사람들은 똑같은 언어로 반문하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잘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별을 잘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월요일 저녁 당신을 만나 당신의 가슴을 만지고 당신의 입술을 탐하며 당신의 발끝을 간질이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랑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지독한 것입니다. 이봐요 디제이 아저씨. 이거 뭐 하자는 겁니까? 이별을 절대 하지 말라니요? 아직은 추운 3월에는 그녀를 따뜻하게 지켜주라니요? 조금 전의 말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월요일은 어떤 날씨가 될지 모른답니다.
그날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이 글을 브람스 레코드 홈페이지에 써 내려갔던 토요일 저녁이었다. 나는 시벨리우스(J. Sibelius)의 두 번째 교향곡을 시디플레이어에 집어넣고 있었다. 전통 깊은 영국산 시디플레이어는 덜거덕거리며 트레이를 끌어당겼고 윙윙 소음을 뱉어내면서 데이터를 읽어나갔다.
그때였다. 한 소녀가 우산을 접으며 뛰듯이 가게로 들어왔다. 소녀는 두세 권의 악보를 한 손으로 품고 있었다. 큼지막한 손이 두드러졌다.
내 앞으로 다가온 소녀는 웃고 있었다. 덧니, 그래 덧니였다. 통통한 얼굴에 덧니가 보였다. 꽤 긴 머리칼은 질끈 동여맸었나 보다. 까딱 하고 인사를 하더니 소녀는 다시 가게 입구로 가 한 손으로 겨우 우산을 갈무리해 우산꽂이에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서서 진열대를 휙휙 둘러보았다.
나는 소녀의 등을 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소녀가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소녀는 금세 안녕히 계세요, 라는 인사말만 희끄무레하게 남기고 연두색 땡땡 무늬 우산을 펴고서는 비바람이 부는 거리로 나가버렸던 것이다. 소녀가 들었다 놓은 시디는 아르투르 베네디티 미켈란젤리(A. B. Michelangeli)의 드뷔시(C. Debbusy) 전주곡집 제1권이었다.
가게에는 아련한 기운이 남겨졌다. 진열 테이블 위에는 바흐의 악보들이 놓여 있었다. 소녀의 것들이었다. 봄비 위에 다시 비가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3악장 4악장을 끊김 없이 내달아 가고 있었다. 존 바비롤리(J. Barbirolli)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리는 비가 바닥에서 얼어붙어버리는 건 아닐까 싶게 그들의 연주는 차가웠다. 나는 새로 들여온 시디들을 그냥 둔 채, 마냥 앉아 시벨리우스를 끝까지 들었다. 1962년 10월 런던에서의 연주였다. 가을날 런던이라니, 스산함이 대단했다. 재킷은 북구의 눈 내린 포구였고, 가게 밖은 어둑어둑한 비 내리는 거리였다.
다음날에도 차갑고 세찬 비가 내렸다. 봄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나는 볼륨을 높였다. FM 라디오에선 탈리아비니(F. Tagliavini)의 착색된 듯 달콤한 아리아를 내보내고 있었다. 나는 낡은 노트북에다 글 나부랭이를 한 자 한 자 쳐 넣고 있었다. 도저히 끝까지 듣기에 힘들 정도의 감미로운 테너가 마무리될 때쯤 전날의 그 소녀가 문을 밀면서 다시 가게로 들어왔다.
웃음, 덧니, 그리고 목례. 소녀는 시디 진열대에서 전날 집어 들다 말았던 미켈란젤리의 시디를 집어 들었다. 소녀는 돌아섰고 내게 시디를 내밀었다. 만 원짜리 두 장과 함께. 소녀의 손에 있던 전주곡집은 소녀가 다시 거두었고, 나는 거스름돈을 소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바비롤리의 시벨리우스를 소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사은품입니다. 듣던 것이긴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대사였다. 소녀는 머뭇머뭇 시디를 받아 들었다.
“엘피는 들으세요?”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가만히 시벨리우스를 유리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덧니를 보이며 싱그럽게 웃었다. 나는 소녀가 놓고 갔던 바흐의 악보들을 꺼내 소녀에게 내밀었다.
연습
“우와, 첼로 소리 좋다. 역시 라이브니까.”
음대의 유서 깊고도 운치 넘치는 골목을 헤쳐 나가면서 내가 말했다. 음대에는 여대생이 많았고 수많은 여대생 사이를 빠져나가는 건, 거듭하다 보니 썩 좋은 재미였다. 소녀가 대답했다.
“저건 비올라 소리예요.”
‘아, 그렇구나!’
시내 외진 골목 안에 자리한 브람스 레코드는 직장인 손님이 많은 편이라 퇴근시간 이전에는 한산한 편이었다. 그 덕에 나는 소녀가 수업을 일찍 마치는 날이면 오후 무렵 소녀가 다니는 음대의 연습실로 숨어들 수 있었다. 다섯 정거장, 가게에서 연습실까지 가는 그 시간이 나는 행복했다.
연습실 건물에는 고시원처럼 각이 진 방이 가득 차 있었는데 1층에는 큰 풍금처럼 생긴 오르간들이 있었고 2층과 3층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는 방이 많았다. 4층에는 피아노는 없이 보면대(譜面臺)만 있는 방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연습실 앞 널따란 정원에 있던, 한때는 파란색이었을 하늘색 벤치. 빛이 바래고 페인트가 벗겨진 그 벤치에 앉으면 온갖 리듬의 피아노 소리와 각자의 피아노를 대동한 소프라노, 테너, 알토, 바리톤, 베이스, 메조소프라노, 그리고 그 사이사이 예고 없이 등장하는 바이올린과 첼로, 콘트라베이스, 트럼펫, 클라리넷, 거기에다 오르간의 장대함까지 겹쳐진 전위적인 음향이 들려왔다. 나는 그 벤치에 앉아 바흐(J. S. Bach)와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를 한꺼번에 감상하며 이른 오후의 달고도 곤한 잠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그곳 연습실에서 소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봄날부터 시작해 찌는 듯 더운 여름을 거쳐 늦은 겨울까지, 나는 학생이 되었고 소녀는 선생님이 되었다.
연습실은 제각기 독립된 공간이어서 데이트하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과할 정도로 열심인 선생이었고 나는 굼뜬 데다 집중력 없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그 연습실에서의 수업이란 때로 소녀의 연주를 듣는 감상의 시간이었다. 어떤 날은 소녀를 졸라 유행하는 가요나 재즈를 청해 듣기도 했다. 소녀는 손사래를 치며 조심스러워했지만 무턱 댄 나의 요구에 대부분 응해 주었다.
마음속으로야 소녀의 열정적인 순간들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내 피아노 실력은 아주 형편없었다. 소녀가 두 대의 피아노용으로 편곡된 차이코프스키(P. Tchaikovsky) 협주곡의 연습용 악보를 펼쳐들 때마다 나는, 내가 피아노를 쳐서 반주를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내 피아노 실력을 원망했다.
늘 진지하게 연습에 임했던 소녀는 땀을 많이 흘렸다. 타건 때문이었다. 소녀의 몸이 강렬한 음향으로 둔갑하는 순간 소녀의 땀이 귀밑으로 흘러내리곤 했다. 특히 라흐마니노프(S. Rachmaninov) 같은 낭만주의 시대의 곡을 연습하는 날에는 땀을 더 많이 흘렸다. 나 역시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기도 했지만 송골송골 맺히는 소녀의 땀이 싫지 않았다. 땀 냄새는 서로 조금 달랐다. 내게서는 나의 냄새가 났고 소녀에게서는 소녀의 냄새가 났다.
우리가 연습을 마치고 아직 어스름한 저녁으로 나오면 사람들은 땀에 푹 젖어 있는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고는 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안개 자욱한 봄날의 새벽녘처럼 몽롱해질 뿐이다.
폐사지
브람스 레코드에서는 브람스를 제법 자주 틀어 둔다. 나는 브람스의 음악을 꽤나 좋아하고, 한동안 브람스의 첫 번째 교향곡만 듣기도 했었다.
교향곡 제1번 다단조 작품번호 68. 브람스의 첫 번째 교향곡은 곧잘 베토벤의 교향곡들과 비교된다. 브람스가 이십 년이 넘게 걸려 작곡한, 이십 대의 나를 울렸던 이 교향곡의 1악장 역시 브람스의 청년 시절에 작곡되었다. 나머지 악장을 작곡한 것은 시간이 좀 지난 후였다고 한다.
그때! 그래 그때 내가 듣던 1악장이 누구의 지휘였는지 어떤 이들의 연주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이 위대한 교향곡마저도 듣다 말게 한 또 다른 예술품을 이야기하려는 참이니까.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양남을 향해 출발한 버스는 막 내리기 시작한 비를 맞고 있었다. 빗줄기는 각도가 큰 사선으로 차창에 급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한 삼사십 분 달리자 바다 냄새가 차창을 넘어 코끝에 스쳐왔다. 아마도 저 앞에 문무왕의 산골처(散骨處)인 바다가 버티고 있던 지점이었다. 순간, 나는 무심코 버스의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그곳에 우뚝하니 거대한 쌍탑이 열을 맞추어 서 있었다. 감은사지 탑이었다.
브람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브람스를 들려주던 이어폰을 팽개치고 운전을 하고 있던 기사에게 소리쳤으니까.
“아저씨, 내려요!”
소녀가 나를 따라 내렸다. 갑작스러운 정차에 놀란 승객 몇 명은 저 사람 왜 저러냐며 중얼거렸다.
우리는 갠 하늘 아래, 폐사지의 돌무더기 위에서 사과를 깎아먹었다. 쌍탑은 말 그대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아름다워서 사과 맛은 느낄 수도 없었다. 사과를 다 먹은 우리는 걸어서 바다로 갔다.
소녀는 그날 밤 내게 물었다.
“나, 뚱뚱하죠? 이 팔뚝 좀 보세요. 뚱뚱하죠? 그렇죠?”
나는 살며시 소녀를 안았다.
“내가 뚱뚱한 건 피아노를 잘 치기 위해서예요. 난 힘이 부족해서 몸무게라도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아저씨는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날 밤 소녀가 해초와도 같았다는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다. 소녀와의 추억을 기록한 유일한 사진은 그곳 바닷가에서 바위에 걸터앉은 소녀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바닷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려 얼굴을 다 덮어버린 소녀의 얼굴은 아마도 웃고 있었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민박집 창밖은 아직 시커멨다. 그런데 간유리가 진동하도록 북소리들이 울려왔다. 둥, 둥, 둥, 둥둥, 둥둥, 둥둥둥, 둥둥둥 둥, 둥둥둥 둥둥 둥둥 둥둥 ……. 북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녀와 나는 옷을 꿰어 입고 눈을 비비며 모래사장으로 나갔다.
해가 떠오르려고 했다. 아, 그리고 일제히 바다를 향해 북을 치며 제(祭)를 올리는 수많은 무당과 박수들. 기원(祈願)은 역시 예술의 시작이자 정점이었다. 어둠을 때려 부수듯 북소리가 빨라지자 불쑥 해가 떠올랐다.
소녀는 내 품에 안겼다. 그 따뜻함은 불과 몇 시간 전 밤의 어둠 속에서 내 품에 안겼던 뜨거움보다 강렬했다. 소녀와 나는 숭고해져 버린 걸까.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서 멈추지 않는 북소리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듯 긴 시간을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품은 기분이었다. 아마도 나는, 그리고 소녀는 지독한 아름다움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 같다.
눈물
헝가리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였던 티보 바르가(Tibor Varga)는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두고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이 곡을 연주할 자격이 없다' 고 말했다. 바르가의 차이코프스키는 과연 뛰어났다. 하지만 바르가가 왜 차이코스프스키와 눈물과 빵을 연관시켰는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다만 내게도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연주할 자격이 있다.
소녀는 나를 쳐다보지 못한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스크램블을 만들었다. 친구들은 스크램블을 먹다 잠들었고 나는 식탁에 앉아 스크램블이 듬뿍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었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빵이 젖는 순간 나는, 바르가를 떠올렸다.
아르농쿠르(N. Harnoncourt)의 소싯적 바로크 첼로가 흘렀고, 나는 빵을 내려놓고 친구들이 마시다 남긴 술을 마셨다. 그해 가을 한국의 야구대표팀은 중국에게 크게 이기고 대만에게 크게 진 끝에 일본에 크게 이겼다. 이런 심한 부침이었건만 감독의 소감은 매번 같았다. ‘야구가 다 그런 거지.’ 나는 그 감독이 좋았다. 그래서 소녀에게 말했다.
“인생이 다 그런 거지.”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온 날에 비행기는 높게 떴다. 목적지는 하노버(Hanover)였다. 소녀는 집 앞에서 가족들과 헤어졌고 나와는 공항에서 만났다. 그리고 둘이서, 단둘이서 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긴 밥. 둘이서 밥을 먹으면 왠지 쑥스러웠다. 그렇지 않은 경우의 상대가 몇 있었지만 둘이서 먹는 밥은 왠지 밥스럽지가 않아서 밥을 먹은 것 같지가 않고 밥을 뱉어내면서 하늘을 쏘아보는 느낌이 들었다. 둘이서 말이다.
나는 의지와는 달리 무기력해졌다. 그래도 아침이면 허락하는 한 가지런히 머리를 매만지고 수염을 깎았다. 왠지 지금의 내 모습이 소녀의 과거 속에 정지된 잔상으로 남을 것만 같았다. 또, 한도 끝도 없이 떨어져 내리는 꽃잎들을 쳐다보며 긴 시간 앉아 있기도 했다. 가끔은, 하나쯤 멋진 소나타를 연주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하노버에는 유명한 음악대학이 있고, 또 그곳에는 피아노를 아주 잘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많다고 했다. 소녀가 돌연 유학을 떠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했고 전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야구감독의 말처럼 세상은 본래부터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것이었다. 그냥 나는 어렸다. 겨우 서른둘이었으니까.
툭툭
툭툭은 너의 땀이 떨어지는 소리다.
그리고 눈물이 고일 때 나는 소리다.
하노버에 갔었다. 한적한 카페에 들러 맛없는 탄산수를 사 마셨다. 자그마한 미술관을 둘러보고 시청 뒤 작은 호숫가에 앉아 딱딱한 빵도 씹어 먹었다. 하노버 국립음대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그저 반나절 정도 하노버 시내를 기웃거리다 서둘러 기차역으로 돌아갔다.
하노버에서의 몇 시간은 꼭 꿈만 같았다. 꿈처럼 툭툭 끊어져서 시간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소녀를 찾아볼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이틀에 걸쳐 슈트라우스(R. Strauss)의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를 반복해서 보았다. 무엇인가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독일에서의 내 의식은 툭툭 끊어져서 흐르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툭툭 끊어졌다. 그리움조차 툭툭 끊어져서 나타났다. 툭툭, 툭툭, 툭툭. 난 세상을 툭툭 끊으면서 느끼나 봐, 아니면 세상의 것들이 툭툭 끊어져서 내게 오든가.
열흘간의 독일 여행을 마치고 와서도 때때로 툭툭,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게 문을 자주 닫았다. 웬만한 토요일은 쉬었다. 때로는 월요일까지 쉬었다.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새로운 친구가 생긴 셈이었다. 툭툭, 마음속에서 소리가 불거질 때마다 길을 떠났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정말 많았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콘서트
나는 가게에 앉아 일주일에 한두 권 꼴로 책을 읽는다. 하루는 오래전에 읽었던 이반 부닌(Ivan Bunin)의 ‘깨끗한 월요일’을 다시 읽었다. 새로운 번역으로 읽는 그 단편은 느낌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읽는 도중에 소녀의 땀 냄새를 떠올렸다. 그것이 전날 밤의 술기운 때문인지, 아침의 봄빛 때문인지 잘 몰랐다.
‘신께서 당신에게 편지하지 않을 용기를 주셨으면 해요’라는 문장은 역시 좋았다. 좋아서 두 번을 뇌까렸다. ‘가끔씩 나는 자신에게 시간에 대한 희망 외에 내게 남겨진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묻고는 했다’도 곱씹을 만했고.
나는 하스킬의 D.960을 들으면서 깨끗한 월요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또다시 읽었다. 하스킬의 패시지들은 부닌의 문장들과 부딪히기도 했고 화해하기도 했다. 하스킬의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에선 무심한 듯 깊은 소리가 났지만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내 감정에 가로막혀 주제를 상실해갔다. 주제가 상실되면 음악의 이미지와 메시지는 모두 정지되고 말았다.
불안과 초조와 무기력, 그리고 정지. 돌이켜 보면 나는 참 아름다운 계절에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소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1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그리고 다시 또 몇 해가 흘러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녀는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보내오지 않았다. 브람스 레코드의 홈페이지에는 상품평만 몇 줄씩 쌓여갔다. 소녀가 남긴 것들은 하나씩 하나씩, 때로는 한꺼번에 사라져 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하노버는 지구의 반대편으로 멀어져 갔다.
첫눈이 내린다고들 들떠 있었다. 음악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수줍은 시인 지망생 바그네리안님이 해설을 읽어 내려갔다. 해설은 훌륭했다. 논리적이면서도 시적(詩的)이었다. 하지만 회원들은 어수선했다. 나는 바그네리안님에게 귓속말로 전했다.
“좋은 해설이에요, 음…… 한 편의 시(詩) 같아요.”
바그네리안님은 약간은 실망한 낯빛으로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고 내게 속삭여 주었다.
브람스 레코드 위층에 마련된 간이 감상실에서 모처럼 열린 동호회 ‘브람스 마니아’의 정기 감상회는 그렇게 산만했다. 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첫눈보다는 덧니 소녀로 인해 들뜬 것 이상의 아련하고도 시린 맛을 느끼고 있었다.
브람스 레코드에는 온갖 클래식 콘서트의 포스터가 나붙지만 그날 저녁 여덟 시에 시작하는 소녀의 독주회 포스터는 붙어 있지 않았다. 브람스 레코드가 건물의 2층까지 세를 낼 만큼 성장했지만 나는 못내 덧니 소녀를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딱 한번 펼쳐본 포스터였음에도 나는 그날의 프로그램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메인 프로그램은 2부에 연주할 D.960이었다. 길고 긴 곡인데 소녀가 힘에 부치지나 않을까. 포스터 속의 소녀는 노년의 하스킬처럼 수척해 있었고, 웃는 얼굴이었지만 덧니는 보이지 않았다.
감상회가 끝나고 회원들이 하나 둘 맥줏집으로 몰려간 시간은 일곱 시가 막 지날 무렵이었다. 내게는 두 장의 초대권이 있었다. 브람스 레코드의 넓은 창에 포스터를 붙여주는 조건으로 받은.
나는 가게문을 닫아걸고 큰길로 걸어 나가 택시를 탔다. 길들은 차들로 가득했다. 차들은 전진하지 않는 드뷔시의 화음처럼 움직이는가 싶더니 곧바로 멈춰버리곤 했다. 나는 공연장 밖에 내걸린 포스터의 가장 큰 글자들이 육안으로 보이는 곳에서 택시를 세웠다.
콘서트홀 로비에 들어서자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공연장 출입구 옆에 소녀가 1위를 차지한 콩쿠르의 실황 음반이 프로그램 북클릿과 함께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내가 좌석에 앉자마자 2부가 시작되었다. 소녀가 무대로 걸어 나왔다. 청중들은 박수를 치며 마치 콩쿠르 경연장에서 응원을 하듯 환호성을 질러댔다. 소녀는 담백한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D.960의 첫 음을 눌렀다.
한 음을 누를 때마다, 패시지 하나를 지날 때마다 그리고 그것들이 변주되고, 또 변주된 것들이 반복될 때마다 내게는 소녀와 함께했던 장면들이 한 폭 한 폭 선명해지는 그림들로 되살아났다. 피아노 건반 하나하나의 소리는 소녀의 순박했던 덧니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1악장의 길고 긴 멜로디는 길고 길었던 시간들에 대한 해명이 아니었다. 애써 변명한들 변명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소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일상을 실어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녀의 연주에는 티보 바르가가 자신의 바이올린에 흘렸을 법한 눈물도 묻어 있었고, 하스킬의 지난했던 삶도 묻어 있었으며, 나와 함께 나누었던 어린 날들의 시린 달콤함도 묻어 있었다.
청중들은 모두 소녀의 연주에 빨려 들어간 듯했다. 소녀도 청중도, 그리고 나도 D.960이 더 아름답기를 기원하는 것만 같았다.
네 개의 악장이 마무리되었다. 청중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쳤다. 나도 박수를 쳤다.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소녀는 정중하게, 아주 정중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길고 긴 박수를 치다 말고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소녀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소녀는 커튼 뒤로 들어갔다 다시 무대로 걸어 나와 다시 한번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소녀는 박수가 멈추기를 기다린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청중들은 박수를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소녀는 피아노 앞에 앉기 전에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얼른 가게로 돌아가 시원한 시벨리우스나 들어야지, 아니다, 브람스 마니아 회원들이 있는 맥줏집으로 가야지. 청중들의 박수와 환호가 콘서트홀을 완전히 나설 때까지도 들려왔다. 그리고 잠잠해졌다. 소녀가 다시 연주를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밤새 소녀가 연주를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