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타타 (2/2)

음악소설집

by 현진현

*

놀라울 정도로 오빠는 늘 같았다. 오디오를 들여놓은 그다음 날부터 하루 걸러 한 번씩은 레코드가 든 봉지를 손에 들고 퇴근했고, 늦은 밤까지 어떤 날은 동이 틀 때까지 칸타타를 듣곤 했다. 처음에는 구경거리였고, 나중에는 지겹고도 싫어졌다.

오빠가 생활비로 내놓은 돈은 보잘것이 없었다. 월급의 대부분을 레코드를 사는 데 써 버렸기 때문이었다. 처음 몇 달간 엄마는 그런 오빠에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자 엄마는 섭섭함을 표현했다.

“쟤가 예배당 나가려나 부다.”

일생을 부처님만 모신 엄마도 오빠의 방에서 들리는 음악이 교회의 음악인 줄은 알았던가 보았다.

엄마와 아버지가 오빠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졌다 싶었다. 그러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빠가 칸타타를 듣기 시작한 지 거의 일 년이 된 시점에 나온 엄마의 반응은 신경질적이었다. 나는 엄마가 더 화를 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들을수록 재미없는 음악을 듣는, 아니 그 음악이 어떤 것이든 간에 레코드만 사다 나르는 오빠보다 그 긴 시간 아들의 그 이상한 의식을 참아낸 엄마와 아버지가 내게는 더 대단해 보였다. 그간 오빠를 나무라지 않았던 엄마와 아버지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날도 퇴근길 오빠의 손에는 묵직한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언제까지 그럴 거니?”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듯 말했을 때 오빠는 물론 아버지와 나, 그리고 엄마 자신까지 모두 놀라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엄마는 ‘언제까지 음악만 들을 거니?’라고 물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집안의 기둥이 되고 사회에서도 장대해져야 할 아들이 빠져든 그 무엇을 집어 지칭하기가 두려웠을 테니까. 그때 아버지가 엄마의 말에 한 마디를 보탠 것도 새롭다면 새로운 일이었다.

“재준아, 뭐가 좋다고 그렇게 사다 날라?”

오빠의 대답은 동문서답 같기도 했다.

“아버지, 전 교회에 나가지 않아요.”

오빠는 방문을 닫아버렸다.


엄마는 여전히 파출부일을 나갔고 아버지는 나빠진 건설경기에도 새벽마다 부지런히 일을 다녔다. 엄마와 아버지는 지치고 늙어가고 있음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나 역시 몇 군데의 공장을 전전하고 밤에는 오빠의 셔츠를 다렸다. 하지만 오빠의 칸타타 듣기는 계속되었다. 오빠는 엄마와 아버지의 지친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 물론 오빠의 얼굴에 미안한 표정이 없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때때로 오빠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무슨 돈을 그렇게 잘 쓰는지, 하는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두 해를 넘겨 오빠가 칸타타에 더 열중하자 아버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는 모든 것이 더 지긋지긋해졌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는 나대로 그랬을 것이다. 어느 날 마당에서 빨래를 하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오빠를 보고서 나는 오빠를 향해 중얼거렸다.

“오빠 좀 이상해, 아니 아주 이상해.”

오빠는 정말 이상했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응도 이상했다.

“오빠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칸타타의 코랄을 부르는 성가대만큼이나 우렁찼다.



*

누군들 짐작조차 할 수 있을까. 멀쩡한 한 남자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종교음악을 듣기 시작해서 세 해 동안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17세기에 이탈리아의 모노디에서 생겨난, 아리아·레치타티보·중창·합창 등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성악곡의 한 형식. 어원은 이탈리아어의 cantare(노래 부르다)이며, 기악곡 형식의 소나타에 대응하는 말이 된다. 가사와 내용에서 실내 칸타타(cantata da camera[이])와 교회 칸타타(cantata da chiesa[이])의 둘로 나누어진다. [중략] 독일의 칸타타: 칸타타라고 하는 말은 원래 실내 칸타타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18세기 초부터 겨우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음악에도 전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초는 독창용 칸타타이며, 18세기 전반까지의 칸타타는 거의 이탈리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연장에 불과한 의미밖에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성서 중의 격언을 가사에 넣기도 하고, 성서 구절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해설적인 서정시를 삽입하기도 하는 형태가 행해졌고, 이것들은 교회력이 있는 특정한 축제일이나 일요일의 예배용 음악으로서 즐겨 쓰였다. [중략] 바흐가 남긴 200곡이나 되는 교회 칸타타는 형식 내용이 모두 극히 풍부하여, 여러 가지 악기 편성에다 독창·중창·합창이 잘 짜여 있다. 폴리포닉 하게 구성된 합창에서 시작되어, 레치타티보와 다카포 아리아의 부분이 몇 대목인가 이어진 뒤, 합창으로 끝나는 다부분(多部分) 형식이 흔히 보인다. 콘체르타토 양식도 널리 활용되고, 때로는 이탈리아 오페라와 기악곡의 영향이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음화적(音畵的)인 수법도 쓰이고 있다. 바흐 이외에도 북스테후데·텔레만 등에 많은 교회 칸타타가 있으며, 그 뒤에도 많은 프로테스탄트 작곡가가 칸타타를 작곡하고 있으나, 대다수는 특별한 기회를 위하여 작곡된 것으로, 차츰 오라토리오로 흘러들어 간다. [출처: 음악대사전, 세광출판사(1996)]


도대체 오빠에게 바흐는 무엇이고 칸타타는 무엇이었을까. 오빠는 왜 바흐의 칸타타를 그토록 오랫동안 열심히 들었을까. 언젠가 용기를 내어 오빠에게 물어본 일이 있었는데 정작 오빠는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씨익 웃기만 했다.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는 표시였을까. 오빠는 칸타타를 듣는 이유에 대해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빠가 칸타타 듣기를 그만둔 날부터 엄마도 아버지도 오빠의 그 과거에 대해 함부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과거의 상처와 미래의 두려움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였다. 이런저런 까닭으로 나는 칸타타에 대한 오빠의 이야기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오빠는 정말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지금에야 몇 가지를 짐작해보기는 한다. 그것으로 오빠의 기이한 3년을 설명해낼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오빠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그것에 관해 내가 기억하는 한 순간은 어느 일요일의 새벽이다. 물론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라 언제인가 아버지가 전해 준 이야기다. 아버지는 그것이 무척이나 소중한 추억인 것처럼 조심스럽게 딱 한 번, 오빠의 그 어릴 적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주말이긴 했지만 아버지는 일을 나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났다고 한다. 어둑한 마당으로 나서던 아버지는 왠지 모르게 오빠의 방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오빠의 방 여닫이문을 숨죽여 열었을 때 아버지는 일곱 살짜리 오빠의 등을 보았다. 미동조차 없이 오빠는 방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빛이라고는 어슴푸레 밝아와 겨우 흑과 백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양 밖에 없는 시간에 오빠는 ‘이야기책’을 읽고 있었다. 게다가 오빠는 아버지가 세 번이나 불렀을 때까지 책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아버지가 오빠에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형광등을 켜주는 것 밖에 없었다고 했다. 대견했던 것이다. 불 켜고 읽어라, 하는 것이 아버지의 조언이었다. 아버지는 책상을 사줄 돈도 없었고 책을 사줄 돈도 없어서 안타까웠다고 덧붙였다.

오빠는 자라면서 몇 번이고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나 또한 언제인가 오빠가 책에 빠져들어 등교시간까지 잊어버리는 걸 보기도 했다. 아버지는 오빠의 독서에 감탄을 한 모양이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오빠의 특별한 집중력, 다시 말해 새롭고도 생소한 세계에 자신을 가감 없이 빠트리고야 마는 모종의 자기희생(自己犧牲)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한 가지 일에 빠져들었다는 것만으로 오빠의 칸타타를 설명해 내기는 어렵다. 그 시절 오빠의 독서는 가족에게 기쁨을 주는 행동이었으니까.

오빠의 방을 청소하면서 본 책상 위의 메모로 유추해 볼 수도 있겠다. 오빠가 한참 칸타타에 빠져있을 때였나 보다. 오빠는 밤늦게까지 칸타타를 듣다 잠이 들었던 듯했다. 그 메모가 쓰인 16절지 한 장이 있었고, 그 메모 옆으로 대학 입학을 축하하면서 아버지가 사준 만년필이 뚜껑이 열린 채 놓여있었다. 메모는 그랬다.

죽음만큼 중대하고 실질적인 문제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또박또박 써 놓았다. 오빠는 죽음의 문제에 빠져있었던 것일까? 칸타타는 종교음악이고 종교란 죽음을 다루는 것이니까. 내가 오빠의 메모를 읽고 난 후 그런 의문에까지 이른 것은 그로부터 훗날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오빠의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오빠가 죽음의 문제에 집착했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오빠의 책상에는 늘 칸타타의 가사를 해석하기 위한 독일어 사전이 놓여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성경이나 십자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오빠의 표정은 죽음을 고민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칸타타를 들을 때의 오빠는 참지 못해 감격해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칸타타를 듣지 않을 때에는 평소처럼 묵묵했다. 그 글귀란 그저 다른 누군가의 말을 옮겨 적었을 뿐이라는 가정이 타당할 것 같다.

오빠가 칸타타에 빠져든 것은 그저 칸타타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해낼 도리가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어떤 이유가 더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

오빠의 방에서 음악 소리가 멈췄다. 잠시 후 브이자로 펼쳐진 오빠의 구두가 반대방향으로 돌려지면서 오빠는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오빠는 대문 옆의 화장실로 가지 않고 내게로 걸어왔다. 더운 기운에 그때껏 마루에 앉아있던 나는 오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몇 초간 가만히, 오빠는 서 있었다. 그러더니 나에게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그게 뒤춤에서 나왔는지 오빠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왔는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간 오빠에게 무언가를 받아본 일이 거의 없었기에 나는 쉽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 하지만 곧, 오빠가 들고 있는 것들의 부담을 눈치껏 알았으므로 오빠가 내민 것을 받았다. 통장과 도장이었다. 손 안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이제 다 들어봤다. 됐다.”

무슨 말인지 나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통장을 만지는 내 손의 감각은 편안해져 있었다. 통장에 쓰인 오빠의 이름이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오빠의 얼굴을 쳐다봤다. 오빠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오빠는 돌아서서 오빠의 방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칸타타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며칠 뒤, 오빠는 방안에 있던 오디오를 내다 팔았다. 오디오가 처음 들어오던 날처럼 누군가가 와서 오빠와 함께 오디오를 내갔다. 연결된 선들이 하나하나 해체되고 오디오는 방바닥에 덩그러니 놓였다가 하나씩 둘씩 들어오던 때처럼 집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와 함께 오디오를 내간 오빠는 한참 뒤에야 집으로 돌아와서는 오디오를 팔아치운 값인지 지폐 다발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예쁜 옷 사 입어’라고 오빠가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이 너무 낯설어서 웃음도 눈물도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당장 오빠의 통장에는 돈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달부터 오빠의 월급은 꼬박꼬박 통장으로 들어왔다. 몇 달째 오빠가 칸타타를 듣지 않자 엄마와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즈음부터 오빠는 저녁마다 내 앞으로 걸어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니?’,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 것 같으냐?’, ‘어머니 소원이 무얼까?’, 그런 것들이었다. 오빠는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내게 친절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는 퇴근 후에 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고 엄마 대신 된장국을 끓이기도 했다. 그다지 훌륭한 맛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리고 엄마의 소원대로 맞선을 보러 다녔다.

나는 솔직히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서 우리 가족은 오빠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회복했고, 그 믿음은 마침내 십여 년 전 고시 1차 시험에 합격하던 때의 오빠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 있었다. 오빠는 집안의 기둥답게 든든하게 우리를 지탱하기 시작했다.

월급 말고 어디서 돈이 생기기라도 하는 날이면, 오빠는 아버지의 양복을 사들고 들어오기도 했고, 엄마를 위해 돌침대를 사들이기도 했으며 나를 위해 머리핀을 사 오기도 했다. 내 기억에는 그것이 레코드를 내다 팔아서 생긴 돈이었던 것 같다. 오빠 방의 한쪽 벽을 채우고도 남았던, 터무니없이 많았던 그 칸타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누군가의 손에서 누군가를 위해 그 조화로운 성가를 들려주고 있겠지.


겨울이 닥쳐오자 나는 오빠 손에 이끌려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했다. 늦깎이이긴 했지만 나는 어릴 적 꿈대로 국문학도가 되었다. 오빠는 내가 하던 공장일을 그만두게 했고 오빠의 친구가 사장으로 있는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을 시켜주었다.

나는 첫 학기 기말시험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오빠는 내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나서 몇 번이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나를 먼저 시집보내고 나서 이듬해 봄에 엄마가 짝을 지워준 작고 예쁜 여자와 결혼을 했다. 오빠가 결혼을 하면서 우리는 이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의 새 집은 남향의 빛 바른 곳에 터를 잡은 깨끗한 집이었는데, 오빠가 어떻게 그런 집을 구했는지는 몰랐지만 내 남편까지 우리 식구 모두는 지금도 오빠를 자랑스러워하며 그 집에서 살고 있다.

오빠도 3년은 함께 살았다. 그 3년 동안이 넘치게 행복해서 지금도 아득하다. 오빠는 캐나다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되었고 올케 언니와 조카도 몇 달 지나지 않아 캐나다로 건너갔다. 먼 나라에서 날아오는 오빠의 목소리는 항상 포근했고, 그것을 듣는 우리 식구들은 행복했다. 오빠는 서울의 본사에 들릴 때마다 공항에서 곧바로 집으로 달려와 엄마와 아버지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또 적지 않은 돈을 옛날의 그 통장으로 송금해왔다.

며칠 전 올케가 국제전화를 걸어왔을 때 나는 물어봤다. ‘오빠는 요즘 뭐하고 놀아요?’, 하고. ‘지금은 아이들이랑 하키 갔어요.’하고 답이 건너왔다.

나는 가끔 생각해본다. 이 행복이 모두 바흐의 칸타타 때문은 아닐까, 하고. 나는 때때로 오빠에게 물어보리라 작정하기도 한다. ‘오빠에게 칸타타는 무엇이었는지’를. 하지만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만은 않다. 이번 추석 땐 꼭 물어보아야겠다. 다들 묵은 얘기처럼 관심 없어하는 척하지만 엄마와 아버지도 궁금해하지 않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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