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일본 지바에서 공연이 있었다. 지코라든가 설현이라든가 그런 연예인들의 공연이었고 나는 그 공연과 방송을 주최하는 측의 일원이었다. 보통은 사이타마에서 열린다고 하는데 그 해에는 지바에서 열렸다. 박자에 맞춰 불빛 반짝이는 형광봉을 흔드는 일본 관객들과는 달리 나는 하릴없이 도쿄를 왔다 갔다 하며 며칠을 지냈다. 우리 일행에는 일어에 능통한 응희가 있었다. 우리는 도쿄에 가기 위해 지바의 어떤 역에 서 있었다. 응희는 전철역 지도를 보면서 내게 물었다. "길양사지?" 하지만 그 한자는 '양'이 아니라 '상'이었다. "길상사야." "정말?" 시를 아는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만 그때 나는 백석을 떠올렸다. 도쿄의 아오야마(청산)를 지나가도 백석이 떠올랐다. 백석의 시가 좋으면 그 시를 좋아하면 그만인데 자꾸만 백석이 떠오르는 건 내가 그의 시보다 그의 존재감을 중히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은 또, 그의 삶이 참 딱하다 못해 못내 내 일처럼 쓰렸기 때문은 아닐지.
시의 마지막이란 의미로 시인의 일곱 해를 다루었는데, 핵심의 기제는 맥 빠지게도 '문학성'이다. 본질과 수단의 문제인데 단박에 '쇼스타코비치'가 떠오른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명백하게 아름다운 작품을 남겼지만 보다 더 명백하게 스탈린의 명령에 따랐다. 시가 처하는 조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시의 밖과 안을 어떤 식으로 구분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히 생각하면 시는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시 그 자체로 읽는 것이 맞겠다. 간단하게 생각해도 될까? 시가 그 자체로 삶이 아닌데? 역시 모르겠다. 시의 마지막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시를 읽는 이유는 시어의 아름다움과 시 한 편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향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인 시인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시가 시인을 속이지 못하고 시인은 시를 속이지 못한다. 시간의 맥락이라는 것이 있기야 하겠지만 시라는 영역에 들어와서는 다른 온갖 것들과는 다르게 핏줄 같은 맥락이 있지 않을까. 엄밀하게 보면, 시는 시인의 증거가 되지만 시인은 시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요사이 책을 내거나 만들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다 보니 문학과 출판을 혼동한다. '시달린다'는 건 책을 내지 않거나 만들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내가 쓴 책을 내가 만들어서는 그 행위가 문학적이지 않은 것은 물론 어떤 행위인지도 가늠하지 못하는 몽매함에 빠질 것만 같다. 누군가에게 읽혀야만 책이고 문학이다 싶은 생각은 깨어나서부터 오후 네 시 정도까지만 부유한다. 문학이고 책이고 팔려서 돈이 된다는 확신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점도 한 몫하고.
백석 시의 매력을 느끼고 싶다면 그의 시 중에 대략 100편 정도를 읽으면 좋겠다. 30년대 발표한 시부터 시간의 순서대로 읽으면 그 100수가 백석 시를 충분히 느끼게 해 줄 것 같다. 시를 읽으면서 백석의 삶이 궁금해질 텐데 이동순 선생의 저작물과 안도현 시인의 '백석 평전'을 읽으면 좋을 것 같고 굳이 김연수 작가의 소설은 읽지 않아도 좋겠다. 백석의 시와 삶을 다룬 논문들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안도현 시인의 책 정도가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 가공의 인물로 보이는 러시아 시인 '벨라'를 끼워 넣은 김연수 작가의 소설은, 그의 장편들이 보통 그랬던 것처럼 뒤로 갈수록 흐리멍덩하다. 시인의 이야기를 함부로 접근했을 때는 아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허세를 좀 부리자면 애초 한글로 발간된 소설이나 장편소설은 거의 몇십 년 만에 읽었는데 조금 후회된다. 시를 토대로 시인의 삶을 재구한다는 것은 욕심이다. 시는 시인의 삶을 뛰어넘고, 시인의 삶은 그 시 아래 종속된다. 그만큼 그의 시는...
챕터의 끝부분을 미문으로 공들였으니 백석을 아는 사람들은 챕터의 마지막 문장들만 읽는 것도 괜찮은 독법이 아닐까 한다. 밝혀진 바로는, 백석의 시는 그의 삶보다 더 아름답다.
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