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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Hyun Jul 10. 2021

떠나간 버스를 되돌리기 힘들다는 것은 잘 알고

카피 다시 쓰기 (5)

십오륙여 년 전 출근길은 과천에서 갈아타는 코스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코스지만 기억 속에서는 분명 과천의 버스 정류장에 내려 또 다른 버스를 탔습니다. 싸이월드에서 사진을 찾았습니다. 그때도 사진을 찍으며 출퇴근을 했군요. 사진은 버스 정류장의 한 기둥을 찍은 건데, 왜 찍었냐면 거기에 누가 사람을 찾는 방을 붙여 놓았던 겁니다. 사진으로부터 전문을 옮겨봅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지난 8월 19일 토요일 저녁 9시 반경 11-5번 버스에서 눈이 마주쳤던 그녀를 찾습니다. 제가 먼저 부흥동 사무소 정류장에 내렸지만 내려서도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 눈빛이 생각나서 며칠밤을 잠을 못 이루다가 이렇게 전단지까지 붙이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신다면 꼭 메일을 보내주세요.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미 떠나버린 버스를 되돌리기 힘들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 1%의 확률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이 글을 남깁니다. 메일... 기다리겠습니다. ps. 장난 메일은 보내지 말아 주세요. 메일 주소 : 블라블라@chol.com”

비교적 장문의 이 ‘호소문’에선 크게 두 가지 포인트가 눈에 뜨입니다. 먼저 띄어쓰기가 완벽하지 않은 점. 두 번째는 ‘떠나버린 버스’ 운운에서의 올드함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가지 포인트 외에는 딱히 지적할 내용이 없어 보여요. 

‘사람을 찾습니다’를 밑줄 그어 헤드카피로 올린 것은 적절합니다. 또 '내려서도 눈을 마주치고 있었습니다'라는 대목은 감동적이기까지 하죠. 이런 상황에 대한 묘사는, 묘사만으로 타깃과 절절하게 교감합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해후하지 못했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우선 배제해야 할 주변 상황들이 있습니다. 1. 여자는 유부녀였다. 2. 여자는 째려본 거였다. 3. 여자가 이 전단지를 못 봤다. 
 

‘글’이 보여주는 것들은 정말 많습니다. 글쓴이의 면모를 글보다 더 잘 드러내는 것은 글쓴이의 몸 - 관상이나 수상이나 족상 - 밖엔 없을 정도일 겁니다. 특히 같은 사람이 보낸 메일을 몇 달간 읽다 보면(가령 윗 부서장의 메일) 메일을 쓸 때의 심리상태도 대략은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남자는 이 글을 수십 번 워싱했습니다. 문장과 문장의 연결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에서 ‘이미 떠나버린…’으로 이어지는 긴장은, 자못 장렬하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 여전히 천리안의 계정을 메일로 쓰는 묵직함에다, ‘사람을 찾습니다’는 카피를 헤드라인으로 올리는 구성적 합리성을, 이 라이터는 지녔습니다. 거기에 꼼꼼함과 진정성도 갖췄습니다. 남자는 눈빛으로 사랑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숨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체와도 같은 문체로 교감했을 두 사람은 결국 만났을 테고 결혼을 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잘 살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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