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un Hyun Aug 13. 2021

죽을 거 같아

- 철학적 카피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 는 문장을 바꿔보면 ‘우리는 늘 죽는다’가 됩니다. 

‘늘’이라는 건 뭘까요? 내일 아침에 죽어도 오늘 저녁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늘 죽습니다. 

늘 죽는 카피라이터가 늘 죽는 사람에게 말을 하고 글을 씁니다. 우리의 공통점은 죽음이고 거기에 공감대의 저변이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고 부사절을 꺼내는 순간, 우리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합니다. 이걸 사도 돼, 여길 가도 돼, 이래도 돼, 저래도 돼… 죽음이 우리에게 수많은 허가를 내줍니다. ‘저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해도 돼. 된다고! 어차피 죽을 인생…’ 뭐, 이런 식인 거죠. 

물론, 어차피 죽을 인생에도 애매함은 스며드는데요. 늘 죽는 것만큼이나 늘 죽는다고 인식하고 있진 않은 거죠. 죽는다는 인식이 귀찮을 때도 있고요. 그래요, 애매함은 애매함이고 귀찮음은 귀찮음이지만, 역시 우리는 늘 죽습니다. - 이것이 바로 죽음의 경쾌함입니다. - 어차피 죽을 인생, 그녀가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죽으리라. 경쾌하죠. 


죽을 거 같아. 


아파서? 좋아서? 사랑해서? 기뻐서? 갑작스러운 죽음은 희로애락 모두를 활용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살다가 어느 순간, 죽음이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죽음은 더 말할 나위 없고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두려움의 끝자락까지 가 보기도 합니다. 

황동규 선생께서 지난해 가을 낸 시집 [오늘 하루 만이라도]에 실린 ‘시인의 말’을 읽다 보면 사실상 ‘경쾌하지 않은 죽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 시집이라고 쓰려다 만다. 앞으로도 시를 쓰겠지만 그 시들은 유고집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 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 삶의 마지막을 미리 알 수 없듯이 내 시의 운명에 대해서도 말을 삼가자. 
지난 몇 해는 마지막 시집을 쓴다면서 살았다. 
2020년 가을  황동규


그렇지만 선생의 이 시집은 참으로 경쾌합니다. - 선생께서 죽음을 경쾌하게 대하려 하는 시적 제스처가 참으로 경쾌합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집 8층까지 오르는 층계 일곱을 
라벨의 ⌜볼레로⌟가 악기 바꿔가며 반복을 춤추게 하듯 
한 층은 활기차게 한 층은 살금살금, 한 층은 숨죽이고 한 층은 흥얼흥얼
발걸음 바꿔가며 올라가 보자. 
- 오늘 하루만이라도(부분)


죽음의 본질은 생의 본질을 관통합니다. 선생의 ‘오늘 하루만’은 두 가지의 본질이 직조되는 순간입니다. - 타인의 죽음은 나의 생이 된다는 것, 알고 계신지요? 

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보면(이 드라마에 대해서는 별도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은정’은 죽은 ‘홍대’를 잊지 못합니다. 타인의 죽음은 나의 생을 관통해 나를 공허함으로 몰고 갑니다. 은정은 죽은 연인과 대화를 나누고 기부로 공허함을 들어내고 산 자의 세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죽음에서 생으로 돌아오지만 늘 죽는 경쾌함의 젊은이인 것이죠. 


광고에서는 가급적 죽음에 대해 카피를 쓰지 않습니다. 어떤 보험회사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는 끝도 없는 잔소리를 대중으로부터 듣기도 했죠. 


10억을 받았습니다
- 2006년 실제 보험금을 지급받은 유가족의 사례 


2006년쯤엔 10억은 꽤 큰돈이었습니다. 타인의 죽음의 값어치가 적나라한 구체성으로 던져졌습니다. 하지만 광고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얘기해야 타당하다고 여겨지죠. - 광고든 우리 생이든 죽음을 얘기하기엔 여전히 민망한 시대입니다.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 생의 본질이기 때문이죠. 언어의 본질, 카피의 본질은 생의 본질을 따라가기 마련이고요. 

작가의 이전글 말해라, 글로 쓰던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