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다시 쓰기, 몇년 전
고향에서 가져온 올드 보틀 위스키를 마십니다. 조니워커, 오반, 밸런타인, 제가 대학시절부터 봤던 아버지의 위스키들을 명절 때마다 한 병씩 두 병씩 가져다 마시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장식장 위스키'는 이렇게 제게로 와 시간의 아로마까지 선사하네요. 이번 명절에 체크를 해 보니 올드 보틀이고 뭐고를 떠나 장식장뿐만 아니라 창고에도 더 이상의 위스키는 없었습니다.
그럴 것 같아서 요 며칠 전 용기를 내서 글렌버기를 한 병 사서는 랩으로 밀봉해서 우리 집 구석 어딘가에 넣어두었습니다. 30년쯤 묵히면 30년 산 비슷한 맛이 날지도 몰라, 하면서. 30년 산이 내 입맛에 맞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예요. 글렌드로낙도 사무실 아래 지하상가에서 판매하고 있는데 사 둘까 했었지만 대체 주세가 감당이 어려운 수준입니다. 외국으로 여행이나 가면 모를까, 함부로 사기엔... 다, 욕심이지요.
올드 보틀을 마시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이 술이 가진 빈티지 당시의 공기는 어땠을까? 향을 맡고 숨을 들이켜다가 그때로 가서 숨을 한번 쉬어보고 싶다는 생각... 그 시대의 사람을 만나든가 해서 역사를 꼬이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저 숨 한번 쉬어보고 언덕 중턱에 투명망토를 쓰고 올라서 그때의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다는 생각 정도를 해 봤어요.
어쩌면 '그때'란 '아버지가 제 나이 때'일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제 나이 때라면 저는 초등학교 6학년이로군요. 그때 공기는 정말 어떤 거였지? 자주색에 하얀색 두 줄 체육복을 입고 일요일마다 학교 운동장에 가서 자전거를 탔던 기억이 납니다. 자전거는 핸들이 멋지게 꼬부라진 성인용이었죠. 형이 빌려 온 멋진 자전거를 제가 다시 빌려서 타고 나가곤 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에 진입하면 먼저, 짝사랑하던 그 아이를 찾습니다. 시내 약국집 딸인 그 아이도 일요일이면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탔습니다. 저는 보란 듯이 탔고, 그 아이는 아마 운동으로 탔을 겁니다. - 이야기가 산으로 갑니다, 다시 내려와서...
OLD IS NEW
산토리는 유명한 위스키지만 한국의 광고인들에겐 위스키보다 저 카피가 더 유명할 것 같습니다. 하여간 산토리 위스키의 이 카피는 빅히트였다고 합니다. 광고는 더 빅히트였다고 하죠.
사랑은 먼 옛날의 불꽃이 아니다
라는 낭만적인 카피가 먼저 나오고, 일본인의 영어 발음으로 '올드이즈뉴, 산토리 올드 위스키'라고 마무리됩니다. 물론 이 광고는 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랜만에 썸이 타오름을 느끼는 주체가 위스키의 주 타깃인 사오십대인 것이죠. 그러니 '올드이즈뉴'는 '50대부터의 새로운 시작' 같은 말로 의역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올드'라는 이름의 위스키가 새롭게 나온 것을 알리고 있고요.
병원 앞에서 도시락을 파는 사십대로 보이는 여자가 있습니다. 젊은 의대생은 늘 여기에 들러서 도시락을 사 갑니다. 매일 먹어서 물리지 않냐는 여자의 말에 의대생은 말합니다. '내가 도시락 때문에 여기 오는 건 아니랍니다'. - 아, 이건 좀 느끼하죠? / 어떤 상사가 있습니다. 그가 퇴근을 합니다. 따라 나오던 젊은 여직원이 '저는 과장님 뒷모습 보는 게 좋아요'라고 해버리죠. '좀 봐도 될까요?'라고 애교를 덧붙이고. / 50대 회사원이이 젊은 여직원과 함께 기차를 타고 출장을 가고 있습니다. 젊은 여직원이 눈을 맞추고 말하죠. '신입 때 과장님께 혼나서 운 적이 있어요', '그래서 다짐했죠, 저도 언젠가 과장님을 울려버겠다고'라는 드립을 날립니다. 그러면서 밝고도 맑게 웃습니다. 밝고 맑게. - 어떻게 이런 일이!
쉰을 향해 몇 걸음 남겨두고 있습니다. 드는 생각은, 오래된 것은 바짝 말라있다는 것. 그래서 제 주제에도 작은 불꽃이 튀면 거세게 몽땅 타버릴지 모른다는 불필요한 상상. 하지만 한 잔의 위스키 뒤 은은하게 비치는 그 장식이 불꽃이라면 저 산토리의 캠페인처럼 한달음에 펄쩍 뛰어오를 만큼의 연료는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 하지만 필름라이크하지만 해상도도 선예도도 열화된 저 영상처럼... 나이들수록 죽음에의 가속도는 빨라지고 있습니다. - 혼자라는 고독 속에서 무슨 상상을 못해볼까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나이 든 것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것에는, 오래된 것대로의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나이 든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이다
누군가에게 30년 산이 되기보다, 젊게 사는 10년 산 올드 보틀이 되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래 써서 낡아가는 포터(PORTER)의 가방이 있고, 오래되어서 두꺼워진 필체의 몽블랑 만년필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되어서 멋진 아내가 있고, 태어나서부터 나와 함께 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몇 달 전에 사서는 케이스 속에 들어있는 오래도록 내 곁에 있을 커스텀 기타가 있고, 1993년도에 사 와서는 여전히 듣고 있는 카잘스의 바흐 모음곡 레코드가 있습니다.
나이 든 것이 아니라 오래된 제가 다시 쓰는 이 카피들은, 제가 나이 든 카피라이터가 아니라 오래된 카피라이터라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