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un Hyun Dec 07. 2022

카피 클래스 006

#006 _ 쉬운 카피인데 좋은 카피, 헤어질 결심 

마침내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라고 서래가 말하니까 당연하게도 “마침내”가 귀에 박힌다. 처음에 나는 이런 촌빨  날리는 대사라니, 하면서 대본가를 멸시했다. 이건 너무 대중적이잖아. : 부사 하나로 나를 낚으려 들다니, 했던 것.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이건 쉽고도 좋은 카피라는. 

부사(절)로 된 카피들이 횡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SM5의 “누구시길래…”가 기억이 난다. 이 부사절은 헤드카피였다. 티저(Teaser)다. 서래도 복선을 깐다. 서래의 기대감이 있다면 하이엔드나 대단지에는 진득한 기대감이 묻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을 정면 승부하자니 카피라이터도 클라이언트도 피로감을 느낀다. 그렇다. 부사(절)는 ‘도가도 불가도’ 일 때 동원된다. 마치 3년 차 예비군처럼. 

“마침내 세상에 없던 하이엔드가 온다!”라고 하는 것도 좋지만 “마침내”라는 간결한 기대감이 보다 더 티저에 값한다. 그럼 우리 앞으로 부사(절)를 찾아보도록 하자. 국어에는 대략 2만 3천 종류의 부사(절)가 있다. : 물론 농담이다. 



비유, 어디까지 해봔?

이 멜로드라마는 슬픔을 지향한다. 슬픔의 근원은 마침내 사랑이다. (이런 낯선 조합이라니.) 암튼 해준이 말한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해준은 어쩌면 슬퍼한 적 없다는 확신이 든다. 그런 경험이 없다는. 단지 정서경의 대사를 읽고 있다는. 그의 연기는 A급이지만(눈빛 봐라…) 드라마 속의 해준은 어쩌면. 

슬픔은 그저 슬픔일 뿐이다. 파도도 잉크도 슬픔을 표현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하버마스적 문장’ 속에서 확신을 가진 인간 이성은 말한다. 슬픔은 사람에 따라서 덮치기도 하고 물들기도 한다고. 이 카피 자체가 슬프다. 그렇다. 이것은 비유적 슬픔이고 문장 전체가 슬픔을 강변한다. 

‘비유적 카피’는 커뮤니케이션용 콘텐츠에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프레젠테이션의 서두에 활용한다. 보통은 프리젠터의 삶을 대유 해 비유한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ADHQ의 이** 상무입니다.”라고 시작을 하면 부드럽게 T&M를 바꿔 탄다. “저는 귀사의 CI를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우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는 것을 떠올렸고요. 블루 중에서도 한없이 푸른 블루가 과연 무엇을 지칭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블라블라….”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날 책임질 형사가 품위 있어서.”

물론 서래의 대사다.(습관적으로 부사를 붙이는 것도 경계할 일이긴 하다.) 서래의 품위 없었던 세계를 강변하는 카피다. 올드하다. (나도 잘 차려입은 여자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암튼 그 올드한 것이 맛이다. 우리는 때로 올드함을 지향해야 할 때가 있다. ‘올드’는 그 자체로 가치 개념이 아니다. 도구적 개념이다. OLD IS NEW라는 일본 산토리의 캠페인 카피는 올드와 새로움이 등치 된다. 도구적 활용이다. 카피라이터의 정신세계에는 올드함이 없다, 다만 올드함을 동원해 도구화할 줄 아는 힘이 필요하다. 올드를 끄집어 내 보자. 엉? 서랍에 아무것도 없다고? 그럼 우린 고전을 보아야 한다. 

‘처음부터 좋았습니다’는 참으로 절절하고 올드하다. 멋지다는 말이다. 이 대본가는 언어를 거의 가지고 논다. ‘처음부터 좋은 것이 끝까지 좋다’는 말 아시는지? 어디에다 헤드라인 카피로 써 보기로 메모해 둔다. 


어쩌면(오늘따라 부사를 쓴다.) 사람은 집이다. 처음부터 좋았던 집은 끝까지 좋다. 그럴듯하지 않은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이 ‘마당, 이웃, 그리고 파티’라고들 하는데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산해경

과연 이 영화에는 고전이 나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람 사이’를 설명한다. 

“이 산은 너무 조용해서 나무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데 사람이 이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면 사라져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산해경의 이 구절은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또 부사) 대본집에 나온다. 

사람이 사람이 된다는 설정은 매우 커뮤니케이션적이다. 그래서 나는 대본집의 저 구절을 몇 번이고 읽었다. 처음엔 대여섯 번 읽었다가 나중에는 스무 번을 읽었다. 그랬더니,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소통한다는 의미로 들려왔다. 이런 구절이 실린 이 대본집의 백미 즉 명대사는, 

“서래 씨가 나하고 같은 종족이란 거, 진작에 알았어요.”

죽음까지도 같이 할 거라는 이런 복선이지만… 쉬운 카피는 아니다. 쉽고도 아름다운 카피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신산해경이다.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할머니 폰 바꿔 드렸어요, 같은 기종으로. 전혀 모르고 계세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쓰키다, 사랑해, 주뗌… 뭐 이럼 되는데 일케 길게 말한다. 카피란, 언어란 그렇다. : 명백하게 물리적인 무게가 존재한다, 카피에. 길게 써야 할 카피는 길게 써야 한다, 목적에 맞게. 진정성이 목표인데… “서래 씨, 사랑해.” 이래 버리면 영화가 재미가 없다. 카피가 와닿지 않는다. 중요한 카피는 길게 쓰자, 그런 다음 줄이는 것이다. 우리가 추앙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두 배 수 정도의 원고를 만든 다음, 그것을 줄인다. 뼈를 깎는 듯한 교정을 본다. 그래서 탈고 후엔 모든 작가들이 아픈 것이다. 우리까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만. 



“사이는 됐고, 이사나 가자.”

서래의 대사다. 서래는 한국어와 말장난하는 사이다. 그래서 이사를 가는데 해준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간다. 광고 카피의 말장난을 무진장 싫어하지만 가끔은 좋아할 수도 있다. : 그런 경우는 대부분 의미가 깊거나 심하게 웃기는 경우다. 곱씹어 보자. 의미가 깊거나, 심하게 웃기거나. 

“사실 원전 완전 안전하거든요” 

어제 1그룹 카피팀과 에스프레소집에 가서는, 전무님 권유로 에프프레소잔을 겹쳐 쌓았다. 그리고 우리는 연습했지. 뭘로? 기억이 안 난다. 좋은 카피였는데…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이건 호소력이다. 영화 춘향전에, “니가 왜 일케 좋냐?”라고 변학도가 춘향에게 말한다.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는 대사죠?) 내가 글케 나쁘냐? 니가 왜 일케 좋냐?

너무 좋은 것이다. 아, 너무 좋은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좋아라 하시는 ‘구어’이다. 인생은 구어적 인생이지만, 우리의 이성은 문어적 이성이고… 구어는 문어와 적절하게 섞였을 때 신선하다.(고 나는 본다.) 



“다른 남자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영화의 제목이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유일한 대목이다. 아프다. 여러분들도 아픕니까? 박용우는 대체 뭐가 되는 건가? 그런 취급을 받아도 좋은 인간이죠. 서래는 그런 인간을 잘 골라낸 거예요. 왜? 박해일과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왜 자꾸 물어요?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그게 중요해요, 당신한테? 그게 왜 중요한데요? 당신 만날 방법이 오로지 이것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굉장히 중요한 대사이고 카피다. 우리는 충분히 친절할 필요가 있다. 당신을 만날 방법이 오로지 이것밖에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빙빙 돌면 안 된다. 대단지는 대단지라고 하고, 하이엔드는 하이엔드라고 해야 한다. 그 말을 우리는 해야만 한다, 전달될 수 있도록. 그래서 친절함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면서 서래는 텐션을 준다. “그게 중요해요? 당신한테? 그게 왜 중요한데요?” 아… 무지 강조된다. “유일한 이 방법”이 말이다. 



“你说爱我的瞬间, 你的爱就结束了。你的爱结束的瞬间, 我的爱就开始了啊。”

이런 카피도 언젠가는 써야 한다. 너무 감성적이라고? 그게 대중적인 감성이랍니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하지만 이 카피는 깊이가 있는 감성이에요. 우리 알잖아요? 먼저 고백하면… 아닙니다. MZ세대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감성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중국어를 번역 앱으로) 날 떠난 다음 당신은 내내 편하게 잠을 한숨도 못 잤죠? 눈을 감아도 자꾸만 내가 보였죠? 당신은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날 밤 시장에서 우연히 나와 만났을 때, 당신은 문득 다시 사는 것 같았죠? 마침내.

(해준의 빰에 손을 대며) 이제 내 손도 충분히 보드랍지요?” 

그냥 멜로다. 멜로. 서래의 이 대사는 이 영화가 근현대 멜로의 계보를 잘 잇고 있다고 강변한다. 카피적으로 보면, 노래 가사의 카피 같으다. 매우 인상적인 노랫말, 문득 다시 사는 것 같았죠? 


작가의 이전글 카피 클래스 00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