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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Hyun Dec 24. 2022

카피클래스 007

#007 _ 카피와 독 : [초속 5cm]와 [칼의 노래]를 중심으로

물속으로 들어간 사람에게 본체만체하는 물고기들은 나름의 속사정이 있다고 해요. 물고기들은 독을 뿜거나 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들을 공격하기 전에는 공격하지 않는다고요. 요컨대 내겐 독이 있으니까. - 카피에도 독이 있어야 해요. 독이 없는 카피는 무시당하거나 놀림감이 될 수도 있어요. 사실 무시 당하는 게 놀림감이 되는 것보다 슬퍼요. -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카피에 독을 묻히는지 알아보죠. 묻히기만 하고 독을 쏠 일은 없길 바랍니다만. 


시작은 늘 정밀한 팩트북에 있습니다. 대충 만든 팩트북은 경쟁피티에선 쥐약과도 같아요. 반드시 집니다. 이기는 게 사기. 팩트북 없이 독은 만들 수가 없어요. 말하자면, 팩트북과 같은 역할을 했던 김훈의 빡침은 김훈의 비장미를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간결했던 그의 문체에 독이 스며든 것입니다. 볼까요? (김훈이 빡쳐서 남도로 내려가 칼의 노래를 쓴 이유는 오프 세미나에서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조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집니다. 우리가 카피를 쓸 때에 흔히 마주치는 갈래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의 저 첫 구절과 김훈이 쓰려고 했던 문장, 꽃이 피었습니다, 가 다른 의미를 지니죠. 버려진 섬이건만 섬마다 곳곳 꽃들이 자라나고 있었다는 의미를 김훈은 담배 한 갑을 다 피우며 벼려 내었다고 하는군요. (저도 담배를 끊지 않았다면 좋은 카피라이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만 해봅니다만.) 암튼 저라면, 버려진 섬에 꽃이 피었다, 로 썼을 것 같습니다. 세계를 더 강하고 단출하게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카피의 세계에서는. (아마 어떤 나라의 번역가가 채택할 법한 톤 앤 무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전쟁에서는 그렇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픈 물리적인 현상마저도 비장합니다. 이 카피에는 더 큰 뜻도 숨어있습니다. 이순신은 ‘통제’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마흔아홉 살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죠. 왜군조차도 이순신을 ‘통제’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김훈은 이 문장으로 이순신의 의미를 확장시켰습니다. 전쟁을 바라보는 컨트롤러에서 더 나아가 내면을 컨트롤하는 장군의 면모입니다. 난중일기에서도 물론 이순신은 고뇌합니다만 ‘문장적인 고민’은 그의 통제 자체가 고뇌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이 무슨 개소리냐 하실 수 있는 문장입니다. 죽이되 죽이지 못한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에르메스(Hermes)의 명카피가 생각나는군요. 이 개소리 하나가 이순신의 비장미를 극대화시킵니다. 광고카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카피들이 만들어내는 비장한 세계가 있습니다. 서점주인 최인아 카피라이터님이 쓰신 옛 카피도 떠오릅니다. “운전은 한다, 그런데 차는 모른다.”(SK주유소의 정비소 커머셜이었던 것으로 기억… 실제 최선배 님은 운전면허가 아직도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ㅎㅎㅎ)


자세히 읽어보면, 이순신은 적들을 사랑하고, 적들보다 더 선조를 사랑하며, 그보다 더 백성을 사랑합니다. 사랑에 비장미가 있답니다. 사랑에 실패하면 무거워지는 걸 봐도 그렇습니다. 비장해져요. 죽거나 살거나죠. ‘죽거나 살거나’의 마음가짐이라면 무얼 뱉어도 독이 서려요. 

‘초속 5센티’는 실패한 사랑이야기입니다. 초등6학년 중1학년쯤 되는 캐릭터의 세계관으로서의 사랑이야기죠. 그래서 도쿄와 그 인근의 가까운 역들도 참 길게 느껴지게 그려집니다. 


“너 만나고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가! 가! 가란 말이야!” 

롯데의 히트상품 [이프로부족할때]의 이 카피는 신선한 독을 머금고 있습니다. 콘티도 마찬가지인데… 장쯔이는 고개를 숙인 채 그냥 ‘서’ 있습니다. 독을 물고 서 있어요. 브랜드네임도 벌써 신선하게 혀를 내밀고 있고요.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이건 김훈 식 멘트예요. 사랑은 목마르다, 하면 될 것을 굳이 사랑은 언제나,라고 흘려버립니다. 안 좋은 습관인데요, 이 광고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부사입니다. 


있잖아. 초속 5센티미터래 

두괄식의 이 카피에 ‘있잖아’가 붙어있습니다. 이 감탄식의 카피가 좋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둑을 두다 보면 뒷자리를 생각하게 되는데요. 있잖아,를 빼고 초속 5센티미터래~ 하고 시작하면, 뭐가?라고 묻겠지요. 하지만 있잖아~라고 하면 청자는 일단 기다립니다. 뭐가 있는지 속으로 묻는 겁니다. 


역과 역 사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었고 열차는 역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 정차했다. (중략) 열차는 그 후로 결국 2시간이나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서 있었다. 단 1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지고 시간은 분명한 악의를 품은 채 천천히 나를 지나쳐 갔다. 


비장합니다. 그 누가 이 사랑을 김훈의 전쟁보다 가볍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지금도 그녀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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