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un Hyun Jul 13. 2023

문학과 광고 7

제목 싸움, 카피 싸움 


    밀란 쿤데라가 그제 7월 11일 사망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쿤데라,라고 하면 여러 가지 기억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습니다. 광고와의 관계, 광고의 시선에서만 보자면 쿤데라는 '제목'을 아주 잘 뽑는 작가였죠. 특히 두 개의 긴 제목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무의미의 축제' - 이 제목들은 좀 각별합니다.('가벼움'은 영화화되었을 때도 제목이 매력적이었죠. '프라하의 봄') 문학이 문학가의 직업과 유리되고, 문학이 상업성과 밀착할 때 책의 제목은 중요도가 높아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제목 싸움이다.


    그리고 광고는 카피 싸움입니다. 책의 제목처럼 헤드라인 카피 싸움이죠. 

    일반적인 종합 광고회사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솔직히 좀 진절머리 나지만 또 재미있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카피를 잘 쓰지도 않고 못 쓰지도 않는 축에 속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었지만 평범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죠. 이런 사항을 전제해야 저의 관점이 전달이 될 것 같습니다. - 카피는 그냥저냥이지만 저는 사람들의 말을 재빨리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PT시즌에 날이면 날마다 거듭되는 회의에서 여러 분들이 반복해 말하는 의견이, 일단 지겨웠습니다. 게다가 쓰지는 못하지만 보는 눈은 있는지라 좀 저급의 카피가 장시간 회자되면 제 몸은 뒤틀리곤 했습니다. 일하는 스테프  입장에서 타인의 카피를 마구 까댈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해서 대부분의 경우 잠자코 앉아있었습니다. 물론 CD(Creative Director, 팀장)가 된 이후에는 그 지겨운 시간을 비교적 제 마음대로 중지시킬 수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카피 싸움이야 


    수십 개의 카피가 각각의 A4에 인쇄되어 회의실의 세 벽면을 채우고 있으면 그 답답함이란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곤 했습니다. 그러고 있음 AE처럼 생긴 AE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한 마디 하는 말이 바로 저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카피 싸움이라고... 세상은 카피의 싸움으로 구성되어 있어, 같이 권위적으로 이해되는 말이었습니다. 이 PT에 패배한다면 그건 너 카피라이터 때문이야... 그런 말이었죠. 

    그런데 기껏 말싸움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지겹지 않은 카피는 틀림없이 전략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말이 아니죠. 요약한 말도 아닙니다. (카피란 줄여야 한다는 오해들을 많이 하시더군요.) 카피는 일단, 비주얼로써 전략입니다. 그래서 카피라이터들은 폰트를 고릅니다. 짧은 카피는 짧은 붓질입니다. 긴 카피는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그림이죠. 카피의 형태적 전략에 관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요, 카피는 싸움이라는 저 표현을 우선 파헤쳐 봅시다. 

    일본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예고했던 개봉일에 영화를 상영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눈이 빠지게 팬들은 기다렸을 겁니다.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가 TV에 카피로만 만든 광고를 해서 팬심(팬의 신뢰)과 카피 싸움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순조롭게 지연되고 있습니다]라는 카피는 그렇게 등장했습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잘 만드는 회사가 컴퓨터도 잘 만듭니다]라고 했을 때도 굉장한 전략이 들어있었습니다. LG전자가 [모터 달린 제품은 역시 LG]라는 구전을 퍼트렸을(구전이 퍼져나갔을) 때에도 카피의 전략, 즉 세상 사람들의 심리와 태도를 넘나들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문대통령 캠프의 [나라다운 나라]에도 전략이 들어있었어요, 다만 싸움다운 싸움을 하기에 상대가 좀... 

    전략은 카피 이전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 제 책상 모니터 뒤 파티션에 안양시청 세정과에서 온 [성실납세자 안내문]의 문구, [귀하는 2022년 경기도 성실납세자로 선정되었습니다]에도 앞으로 더욱더 세금을 성실하게 내라는 전략이 앞장섭니다. - 미안하게도 저는 사업을 접고 회사원이 되었습니다만. 

    이제 보면 [카피 싸움]이란 말, 하나마나한 말입니다. 카피 싸움은 결국, 광고전략의 싸움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왜 AE가 이런 말을 얄밉게 하느냐면, 카피라이터들에겐 전략적 글쓰기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략 라이터]이고 [카피 씽커]가 바로 카피라이터입니다. 한데 굉장히 듣기 싫은 말입니다. AE처럼 생긴 AE들이 교묘하게 제작팀을 압박하는 수단이 바로 저 [카피 싸움]이라는 표현인 것이죠. 

    [카피 싸움]이라는 말 자체는 분명 맞는 말이긴 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싸움이 실제로는 카피 싸움에 가깝습니다. 명분의 싸움, 프로파간다의 싸움, 논리의 싸움, 의미의 싸움... 모든 싸움이 [말]로써 기초를 가집니다. 제가 카피를 잘 쓰는 카피라이터였다면 모든 회의에 상당히 느긋했을지 모릅니다. 센스의 촉을 켜고 꿈틀대는 짐승을 기다리다 말의 그물로 내장 속으로 깊이 삼켜버렸겠죠. - 이런 부류들은 캐치력이 좋고 실제 카피까지 잘 씁니다. 저야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라면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회의가 있는 전날, 밤을 새워 카피를 고민하는 타입이었습니다. 저의 카피 싸움은 그때 이미 승패가 결정됩니다. 

    연차가 늘어가면서 현장에서의 구경거리를 갈구하게 됩니다. 품 속에 과도 같은 카피 하나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가면, 오늘은 누가 시퍼런 식칼을 숨겨 들어왔나 심장이 뜁니다. 아... 케이크나 자르는 칼들이었다니 실망한다면, PT의 현장으로 가서 피치를 합니다. 광고주들의 방패는 놀랍게도 두껍습니다. 하여튼!


작가의 이전글 문학과 광고 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