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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d Revolution Aug 25. 2020

호우주의보

팔당댐 수문 관리자에게 드리는 감사 인사

밤새 비가 내렸다. 1~2분씩 빗줄기가 잦아들면 매미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다시 굵어지는 빗줄기와 함께 매미소리는 사그러들었다.  마치 샤워할 때 나는 것처럼 강하게 내리쏟는 물소리에 2~3시간 간격으로 잠이 깼다. 비가 들치기 쉬운 베란다 쪽 창문은 모두 닫아뒀지만, 복도쪽 창문은 열어둔 탓에 에어컨을 켜지는 않았다. 이런 날은 웬지 감성(중년 남자에게도 이런 게 있기는 하다)이 폭발하는 날이다.


문득, '호우주의보'라는 시가 있었지, 생각을 하다가, 이내 그게 최승호의 '대설주의보'였다는 생각을 한다. '백색의 계엄령'이라는 표현으로 저항정신을 갖춘 시로 받아들여졌던, 하지만, 최승호 시인은 현재는 동시작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대설주의보 싯구절이 언뜻 다 기억이 안나 예스24에 들어가 검색해보니, 한 때 내가 좋아했던 이 시인은  '유아/어린이 작가'로 분류되어 있었다. 시인들이 살아남기 힘든 시대이기는 하다. 요절한 기형도는 그래서 영원히 시인으로 남아 있는거지. 그외에 남아 있는 것들은 이제 386들 밖에 없는 것 같다. 황지우도 이성복도 박노해도 다 잊혀지고 있는데, 운동권들은 더 기승이다.


저녁 먹기 전 아이를 데리고 한강을 산책했다. 팔당댐이 방류를 한다고 해서 한강 다리 아래에 갔더니 한강 둔치 아랫단이 모두 물에 잠겨 있다. 상류에서부터 밀려 내려온 누런 황토물이 온 강을 뒤덮었다. 물은 잘 관리되고 있었다. 이 정도 기세로 내린다면 새벽녘에는 중랑천도 잠기고, 경인선이나 경강선 몇군데 선로가 끊기고 아침 출근길이 대혼잡을 빚을 것이다.


옛날 같으면 시상을 떠올리고 있었을 나는 이제 호우주의보라는 제목을 써놓고서 이 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을 만드는 어른들의 생각이라는 것을 안다. 시인들은 감수성으로 이 세상을 한 칼에 잘라내지만,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예상 강우량을 체크해서 하류에 범람이 없을정도로 조심조심 팔당댐 수문을 여는 그 생각과 행동, 제도들이다. 만약 팔당댐 수문을 조절하는 관리자가 갑자기 감수성이 폭발하여 '모두 씻어내려라' 이런 기분으로 수문을 모조리 열어버리고 강 하류가 범람하여 서울이 씻겨내려가는 시적인 상상력을 실현하려고 든다면 그건 꽤나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팔당댐 수문 관리자의 현실감각에 감사해야 한다.


호우주의보에 나도 모르게 계속 TV와 라디오를 켜고 비소식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대학 시절 태풍이 왔던 어느 해 여름 태풍의 눈을 따라서 여행한 적도 있다. 지금은 그리 못하지. 그 치기와 열정을 넘어서 이른 중년의 내 나이가 만족스럽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이 비가 그치고, 수해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잠시 쉴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아이와 함께 저녁 무렵 한강에서 하류 쪽을 붉게 물들이며 해지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던 잠실대교 아래 조망대 데크가 완전히 물에 잠겼다. 팔당댐 수문은 계속 열어둘 모양...수도 서울은 안녕하다.


기왕 떠올랐던 김에, '대설주의보'(최승호)를 남겨 둔다... 물론 온갖 블로그들마다 넘쳐나는 천편일률적인 해석에는 반대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백색의 계엄령'은 비유일 뿐, 어떤 저항정신도 없다. 시 마저도 저항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의 맹신일 뿐이다. 내게 더 좋은 시각적 이미지는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퍼덕이며....'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저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이 시를 쓰게 된 계기는 눈보라 속에서 까만 점처럼 날아가는 새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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