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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닿 Feb 06. 2022

삐딱한 사람

맞는 삐딱한 세상을 만나야지.

 삐딱하게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은 반듯하게 사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동경과 부러움은 느낄 수 있어도 이해는 할 수 없다. 정말 솔직한 심정이다. 왜냐하면 내가 삐딱하게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듯한 자세를 할 수 없다. 언제부터 이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기억이 있을 때부터 이랬다.


 의자에 앉은 무게중심은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어딘가에 항상 쏠려있고 허리도 틀려있다. 의자 자체도 삐딱하게 있어서 왼쪽을 바라보고 작업하거나 오른쪽으로 작업한다. 고개 또한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울여져 모니터를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다.

 반듯함이란 무엇일까. 책상과 노트북이 평행을 이룬 것? 노트가 기울지 않고 무지노트에 글을 쓸 때도 점점 위나 아래로 가지 않는 것?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두어 한쪽을 제외하고 세 모퉁이가 박살나거나 금이 가지 않는 것? -아 이것은 그냥 덤벙거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책을 놔둘 때도 각 맞춰서 놔두는 것이 아니라 항상 되는대로 올려놓아 몇 번이나 쓰러진 전적이 있어도 삐딱한 사람은 삐딱하게 놔둔다. 그렇게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삐딱한 사람은 책을 볼 때도 삐딱하게 바라보고 삐딱하게 펼쳐든다. 어딘가에 있는 노트를 꺼내 좋아하는 문장을 수집하거나 -도중에 삐딱하게 쌓인 노트가 와르르 쏟아지지 않으면 다행-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면 포스트잇을 펼쳐들어 문장을 수집한다. 

 신기한 것은 머릿속에서 잊어버릴지언정 잃어버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삐딱한 사람이 유일하게 삐딱하지 않은 순간이 있다. 물론 완벽하게 반듯한 것은 아니지만, 기술의 도움을 받아야하지만 반듯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순간이 있다.

 운동과 사진이다.


 운동은 자세가 틀어지면 자극을 주고 싶은 근육이 아닌 다른 근육에 자극이 간다. 등 근육이 없는 나라서 가슴과 팔 운동을 하는데 등에 먼저 자극이 가는 것처럼 말이다. 어깨 근육이 없어서 승모근에 힘이 들어가는 것처럼 운동은 그 어떤 때보다 반듯한 자세가 필요하다.


 사진은 삐딱하면 예쁘지 않다.

 수직과 수평만 맞아도 사진은 예쁘다. 물론 물건을 놔두는 것은 여전히 삐딱하지만 전체적인 프레임에서는 수직과 수평이 중요하다. 

 사진에 대해서 배운 적은 없지만 시나리오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시나리오 수업을 들으면서 풀샷, 바스트샷, 클로즈업 같은 용어의 정의에 대해서 배웠고 간단한 시나리오와 UCC를 찍고 배역으로 출연한 전적이 있다. 영상을 어떻게 찍어야 좀 더 연출적이고, 구도적으로 좋은지에 대해 처음 알게된 경험이며, 좋은 경험이었다. -지금은 삭제했는데 삭제하지 않은 편이 더 좋았을 것 같기도. 흑역사지만 낄낄거리면서 웃을 수 있는 추억이기도 하니까.-


 삐딱하게 사는 사람은 그냥 삐딱하게 살기로 마음 먹는다. 뱁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지 않기 위해 삐딱한 자신을 인정한다. 모로 세상을 바라보면 그에 맞는 세상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보통 사람이 걸어가지 않는 길을 걷는다. 그렇다면 힘들지만 더 재미있지 않을까.

 삐딱한 사람은 평범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에 맞는 삐딱한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아니면 뭐, 삐딱한 사람에게 맞는 삐딱한 세상을 만들자.

 판이 없다면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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