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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글나눔 Apr 15. 2021

역병을 대하는 바른 자세

조선시대는 어땠을까?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나 싶었던 코로나 시국이 어느덧 일 년을 넘었다. 마스크를 불량하게 쓰고 있다는 이유로 도끼눈을 뜨고 다른 사람을 보지 않게 될 날은 언제쯤이나 되어야 올 것인가. 타인의 비말이 가득 떠다니는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서도 질병을 걱정하지 않게 될 날이 오기는 할까?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했던 일을 포기하고 어려움에 직면하였으니,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GX(Group exercise)인 스피닝을 배우며 동네 친구들도 사귀고 한참 재미가 올랐을 때에 GX를 포기한 것 정도는 어디 가서 불평이라 말할 거리도 안 된다. 물론 스피닝 선생님들께는 재앙 같은 일이었지만. 다행히 지금은 적절한 방역 조치를 해 가며 근근이 수업을 꾸려가시는 중인 듯하다. 소심한 마음에 발길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지금의 죄송한 마음은 이 시국이 끝나면 장기등록으로 갚을 생각이다. 


전염병, 소위 역병은 조선시대에도 끊이지 않고 발생하여 수많은 민초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중 1695년(숙종 21)~1699년(숙종 25년)에 있었던 을병대기근에는 특히 그 피해가 참혹했으니, 냉해로 인해 몇 년간 기근이 발생한 데다가 그 여파로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은 급성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도 그 참혹했던 시기의 단편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해에 도성에서 쓰러져 죽은 시체가 1천5백82인이고, 8도에서 사망한 사람이 2만 1천5백46인이었다. 서울 밖의 지역에서 보고한 숫자는 열에 두셋도 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이렇게 많은 숫자에 이르렀으니, 기근과 전염병의 참혹함이 실로 전고(前古)에 없던 바였다.
是歲, 都城僵屍, 一千五百八十二, 八道死亡, 二萬一千五百四十六。 京外所報之數, 十未二三, 而猶至此多, 飢饉癘疫之慘, 實前古所未有也。

                                                                                      《숙종실록》 24년 12월 28일 기사 중


 역병이 퍼지면 미신을 믿는 백성들은 간혹 주술적인 방법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했지만 국가적으로는 진휼에 힘쓰고 의원을 보내 구료 하는 합리적인 정책들을 의논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환자가 있는 집이나 마을을 피해 거처를 옮기기도 하고 아예 산사로 가서 역병을 피하기도 했다. 돌아가신 분의 행적을 기록한 글인 행장(行狀)에 역병으로 죽어 감히 수습하지 못했던 친척의 시신을 몸소 염하여 입관하였다는 이야기를 훌륭한 인품을 알리는 예로 전하기도 하였으니, 이를 통해 사람들이 역병을 얼마나 꺼렸으며 또 그런 와중에 희생적으로 주변을 돌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매부(妹夫)가 역질에 걸려 죽자 친척이 아무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즉시 달려가서 직접 염(殮)을 하여 입관(入棺)하였고, 누이를 데려다 가까이 두고서 조석으로 위로하고 음식을 보내서 남들이 좋지 않다고 꺼리는 일(拘忌구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妹之夫遘癘而死。親戚莫敢近。公卽馳赴之。躬親棺斂。迎妹置近地。朝夕問遺。不以拘忌。

                                                 《갈암집(葛庵集)》  송오(松塢) 정공(鄭公)의 행장(松塢鄭公行狀)


코로나와 같이 전염병의 발생 원인을 과학적으로 정확히 알고 있는 현재에도 마스크를 쓰라는 합리적인 제안 조차도 반발하여 따르지 않고, 위험하니 가급적 모이지 말라는 당부도 마다하며 n차 확진의 주범이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옛 조선에서는 원인도 알 수 없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유언비어가 난무하며 민심이 더욱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혼란함 속에서도 중심을 잡아주는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전염병이 창궐했던 어느 시절, 바른 생각을 가진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당부의 편지글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때 일수록 국법을 지켜야지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가는 사람들의 미움을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의 글이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어느 때고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해 미움을 받는 사람이 항상 있어왔다는 것이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구나 싶은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비록 역병을 피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꺼번에 데려가는 것은 너무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다. 네 아내와 누이는 가까운 마을로 내 보내서 손자 동원이를 시켜 옆에서 간호하게 해라. 결코 읍내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 국법을 무시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방자하다고 미워할 것이니 깊이 반성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이런 모든 일들에 반드시 깊이 헤아려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면서 행해야 한다.

雖曰避癘。一時率往。太無防限。婦與趙女。出置近村。使東源在傍看護可也。決不可率往邑底也。不有國法。徑情而行。人必以放恣惡之矣。不可不猛省也。凡百如此類者。必思量顧畏人言而行之可也。

                                                                《명재유고(明齋遺稿)》  아들 행교에게 보냄(與子行敎 )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일단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마음으로 끌어안기는 도량이 한참이나 부족하다. "대체 왜?" 라는 의문의 물음표를 백 개쯤 띄워본다 한들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하루 걸러 하루 씩 뉴스에 등장하니 이런 일들에 일일이 반응하다 보면 스트레스지수가 너무 올라 삶의 질이 떨어질 지경이다. 이럴 때 일 수록 괜히 우울감에 빠지지 말고 조선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큰 응원을 보내며 이런 사람들의 힘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다 함께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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