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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운장 Jan 22. 2020

혜화동 여관 이문동 여관

내 첫 번째 여관

내 인생 첫 여관은 혜화동에 있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시 원서를 넣었다. 해가 바뀌고 나는 논술 시험을 치러 서울에 올라가야 했다. 서울에 연고도 지인도 없던 나는 엄마와 함께 논술 시험 전날 부산역에서 무궁화호를 탔다. 


당시에는 KTX도 없던 때라 무궁화 아니면 새마을 호를 타고 서울에 갔다. 구포를 지나 동대구역으로 가는 구간. 낙동강을 따라 열차는 북쪽을 향해 올라간다. 가넷 크로우라는 일본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창밖 풍경을 봤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15년도 더 지난 일이라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서울의 겨울은 부산 사람에게 몹시도 혹독했다. 서울의 겨울 추위는 어른들의 말을 통해서만 들었던 터였다. 내복을 끼어 입고 갔지만 견디기 힘들 정도의 추위였다. 대학로에 도착해서 엄마와 나는 여관을 찾아 헤맸다. 


여관의 이름과, 여관방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기억나는 유일한 기억은 그날 밤 내가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일 논술 시험에 대한 걱정이었을까? 그것보다는 처음 와본 여관이 몹시도 불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베개와 이불에 살갗을 스쳤을 때의 불결함. 무엇보다 침대 매트릭스의 외설스러운 삐걱거림. 어둠 속에서 나는 잠에 들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에 근처 김밥 천국에 들러 순두부찌개를 먹고는 학교에 올라가 논술 시험을 쳤다. 어떤 문제가 나왔을까 지금 몹시 궁금한데 알 수가 없다. 시험이 끝나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정문으로 내려왔는데 그곳에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는 서울에 있는 다른 학교에 논술 시험을 치러 엄마와 함께 올라왔다. 이번에도 잘 곳을 찾아 헤매다 여관에서 잠을 잤다.


그때 엄마의 기분은 어땠을까? 금이야 옥이야 품 안에서 키우던 자식이 품을 떠나려고 하는데 슬프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부모는 자식을 세상으로 내보내야 한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었고, 홀로 나온 세상의 쓴맛을 본 적도 없었다.


한 달 뒤 나는 홀로 무궁화호를 타고 대학을 다니러 상경을 했다. 엄마와 헤어지고 열차에서 소리 죽여 흐느꼈다. 엄마와 헤어지는 건 슬픈 거니까. 


지금은 KTX를 타고 부산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한다. 구포를 경유하는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올 때면 그때와 변함없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그러면 나는 잠시 19살의 소년이 되어 젊었던 엄마와 함께 상경했던 날이 생각나 서울 올라오는 마음이 더욱 서글퍼진다.


왜 이렇게 시간은 강물보다 더 빨리 흐르고 

또렸했던 날들은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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