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동 가봤어?
원래 영도에서 떨어져 있던 섬. 매립 이전에는 일본 어선단이 대평동을 정박지로 삼아 많은 선박들이 대평동에 모여들었다. 1887년 일본 다나카 조선소가 영도에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산업이 이곳 대평동에서 발달했다. 1960~70년대는 조선 수리업의 전성기였다. 조선소, 선박부품회사, 선박수리회사, 용접회사, 도장회사 등이 모여 있는 대평동. 최근에는 조선소의 폐업이 이어져 부산 올드타운의 여느 곳과 같이 쇠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평동에 아버지의 회사가 있다. 선박 레이더 설치 및 수리업을 하는 아버지는 1990년 초반에 친구와 함께 회사를 나와 사업을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대평동을 자주 드나들었다. 조선 소하면 삼성중공업이나 한진중공업을 떠올릴 수 있는데, 대평동에 있는 조선소들은 그것들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다. 작은 선박을 만들거나 수리했다.
대평동 사람들
대평동의 색은 붉은색이다. 붉게 녹슨 선박의 녹, 거리에는 녹물들이 묻은 듯 붉은 끼가 돈다. 햇볕에 그을린 대평동 아저씨들의 붉은 얼굴까지. 매그넘의 세계적인 사진가 데이비드 알란 하비가 찍은 이 사진. 대평동의 가장 흔하지만 핵심을 담은 풍경이다. 이 사진을 보고 나도 찍을 수 있는 사진을 뺏긴 기분이 들었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고, 함바집 아주머니들은 무거운 밥상을 머리에 이고 걷는다. 동남아 선원, 러시아 선원들이 무리 지어 다닌다. 닻, 쇠사슬, 그물,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는 쇳덩어리들이 거리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곳. 녹슨 쇠, 페인트, 기름, 선박에서 뿜어대는 매연, 항구 특유의 썩은 내 등이 뒤섞인 냄새가 나는 곳이 대평동이다.
대평동 조선소 체험기
군대 가기 전 겨울 나는 아버지를 따라 대평동 조선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 조선소에 들어가니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배에 붙어 각자의 역할에 몰두한다. 용접공이 철제 마스크를 쓰고 불꽃을 튀기며 용접을 하고 아주머니들이 배에 달라붙어 녹을 떼내려 쇠망치질을 한다. ‘깡깡이 아지메’다. 저임금에 중노동이었다. 하루 종일 깡깡 이질을 하다가 청력을 잃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선장실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전기 공사를 하는데 옆에 목수 할아버지가 작업 중이다. 매일 창원에서 출근을 해서 이곳까지 온다고 했다. 나무를 밑에서 잘라서 가져오는 게 아니라 선장실에서 이리저리 재보더니 그곳에서 나무를 자른다. 갑자기 조선소 작업반장이 올라오더니 목수 할아버지를 나무랐다. 결과물이 좋지 않다며.. 나쁘게 말하면 지랄을 했다. 그리고 나한테 까지 불똥이 튀었는데 갑자기 나보고 돈 줄테니까 그냥 가라고 했다. 작업반장들은 왜 다 이 모양일까.. 조선소 일은 위험했고, 억척스러웠고, 거침없이 사람을 부려먹는 곳이었다.
영도 도선장
대평동에는 도선장이 있었다. 영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없던 시절엔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1910년에 디젤 동력선으로 바뀌고 ‘통~통~’ 소리가 난다고 해서 사람들은 ‘통통배’라고 불렀다. 1934년 영도대교가 놓이고 나서도 대평동-자갈치 구간을 사람들은 통통배로 오갔다. 다리를 건너가면 15분 정도 걸릴 거리가 배를 타면 5분 만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에 산다고 해서 배를 탈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와 자갈치를 간다고 도선장에서 통통배를 탔다. 재밌고 신기했다. 통통배는 2008년에 수익성 문제로 운항이 중단되었다. 수상 택시도 있다. 대평동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갈치에 정박해 있는 배로 이동할 때 타는 교통수단이다. 아버지를 따라 작은 배를 타고 어선으로 이동했다. 파도는 출렁이고 옮겨 타야 하는데 무섭고 두려웠던 기억이 있다.
깡깡이 예술 마을
대평동은 깡깡이 예술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 중이다.
회사를 정말 관두고 싶었을 때, 막연하게 영도에 독립 서점이나 차려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때 떠오른 장소가 대평동이었다. 깡깡이 예술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문화 예술형 도시 재생사업이 시작되고, 한 귀퉁이에 서점을 차리면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나이가 60이 넘으셨고, 슬슬 은퇴를 하실 때다. 물리적으로 이제 힘든 나이이지만 70까지는 하신다고 하는데 말이 기술직이지 막일에 가까운 일이다. 대평동에 있는 아버지 회사에 최근에 간 적이 있는데 아버지 글씨체로 쓰인 작업일지와 손때가 묻은 공구와 기계들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나려고 했다.
지금은 있지만 나중에는 추억의 장소가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최백호의 곡 <1950 대평동> 소개로 글을 마칠까 한다.
최백호는 부산시 영도구 대평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제목의 1950은 최백호가 태어난 1950년을 의미한다.
떠나는 것은 떠나는 대로
남는 것은 남는 대로 이유가 있지
사연이 있지
물결 너머 자갈치에 불빛이 지면
별빛 따라 피어나는
늙은 노래여
지친 파도는 자정 지난
바다로 잠기어 들고
늦은 갈매기 하나 소리도 없이
울며 돌아가는데
한때 고래 따라 떠나간 남자의 창가엔
흰 달빛만이 춤을 추누나
아린 가슴으로
아린 가슴으로
항구는 잠들지 못하네
지친 파도는 자정 지난
바다로 잠기어 들고
늦은 갈매기 하나 소리도 없이
울며 돌아가는데
한때 고래 따라 떠나간 남자의 창가엔
흰 달빛만이 춤을 추누나
아린 가슴으로
아린 가슴으로
항구는 잠들지 못하네
항구는 잠들지 못하네
떠나는 것은 떠나는 대로
남는 것은 남는 대로 이유가 있지
-최백호 <1950 대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