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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목나무와 매미 Sep 12. 2022

우리 가족의 여행 스타일 : 공장식 자유 여행

할 수 있다, 부모님과 유럽 여행

 나와 동생이 성인이 되면서 우리 가족의 여행 스타일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어렸을 때는 아부지도 시간이 없으셨던 데다 우리가 별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주로 편한 패키지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점차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구경을 하는 패키지여행에 싫증이 났고 2013년 미국 여행을 시작으로 자유 여행을 택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우리 가족의 여행 스타일이 뚜렷해졌다. 바로 가족원들의 역할이 조화롭게 잘 나누어져 있는 공장식 여행이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동생이 여행 갈 때 우리 가족의 역할을 배 선원들에 비유를 했다. 엄마는 선장이다. 엄마는 여행의 총책임자로 여행 계획을 수립한다. 엄마는 MBTI가 JJJJ일 것이라고 나와 동생이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할 정도로 엄마는 프로 계획러다. 여행 목적지가 정해지고 나면 관광지, 관광지까지 이용할 교통수단 등을 블로그, 카페를 샅샅이 뒤지면서 계획을 짠다. 한 번 여행 일정이 정해져도 더 알찬 일정이 될 수 있도록 계속 수정하고 수정한다. 



엄마의 고심이 담겨 있는 계획표

  나는 1등 항해사다. 엄마가 여행 계획을 세우면 여행 계획에 따른 실제적인 일들을 한다. 항공권, 호텔 등을 엄마의 확인을 받고 예약한다. 엄마가 세운 여행 계획을 엑셀 파일에 정리하고 여행하는 지역의 맛집을 찾는다. 여행을 가면 현지에서 통역(+손짓 발짓)을 한다. 현금도 관리한다. 계산하고 소비한 내용을 가계부에 쓴다. 돌아와서는 여행 경비를 정산하고 가족들이 찍은 사진과 영상을 모아 동영상으로 편집한다.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나

 동생은 2등 항해사이다. 원래 짐꾼이었는데 운전면허를 딴 이후에 렌터카 운전을 도맡아 하면서 지위가 올라갔다. 길눈이 밝아 지도 보기, 길 찾기 등을 주로 한다. 여기에 컵라면, 햇반 등의 음식 운반하기, 짐가방 옮기기 등의 짐꾼 역할도 같이 한다. 마지막으로 여행에 애교, 감성, 짜증을 한 스푼씩 넣는 감초 역할도 한다. 


알페 디 시우시(Alpe di Siusi)에서 트레킹 코스를 찾는 동생

  아빠는 사진사다. 동생이 운전을 시작하기 전에는 아빠가 혼자 운전을 했지만 지금은 동생이 술을 먹거나 컨디션 난조로 운전하기 어려울 때만 운전대를 잡는다. 여행 다닐 때 고퀄의 사진을 찍어 여행을 기록한다. 지도를 보거나 음식을 주문하거나 줄 서 있거나 여행의 한 순간 한 순간을 포착한다. 덕분에 나중에 여행을 회상할 때 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여행에서 아빠만이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 바로 냄비로 밥하기다! 유럽은 주식이 밀이기 때문에 요리가 되는 숙소를 찾더라도 밥솥은 거의 없다. 햇반을 매끼 먹기에는 짐이 늘어나기 때문에 현지에서 쌀을 사서 냄비로 밥을 해야 한다. 냄비로 밥하기는 굉장히 어렵지만 아빠는 그 어려운 걸 굉장히 잘한다! 일주일 이상의 긴 여행에서 꼭 필요한 기술이다. 


사진사 아빠



냄비밥의 달인

 "가족 여행 다녀왔어요."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되묻는다. "여행 가서 안 싸웠어요?" 

 가족들은 보통 누구보다 편한 사이기에 여행에 갔을 때 함부로 대하기 쉽다. "너는 왜 이렇게 빈둥거리면서 아무 일도 안 하니?" "아빠는 계획도 안 짰으면서 불평이 왜 이렇게 많아?" 그러면서 사소한 감정들이 쌓이고 다투게 된다. 물론 우리도 여행을 다니며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속상했던 감정들은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통해 풀어진다. 다툼들이 있음에도 계속 가족여행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가족 여행을 통한 추억 쌓기'라는 거대한 배를 잘 움직이기 위해 각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서로 맡은 역할을 열심히 했기에 실수를 꼬집기보다는 고생했음을 알아주고 다독이기 때문이다. 더 좋은 추억을 위해 부담을 나누고 서로의 노력을 인정하는 분업화된 가족여행이기에 우리의 가족 여행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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