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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목나무와 매미 Oct 25. 2022

오랜만이야, 베로나!

할 수 있다, 부모님과 유럽여행 Log 6

 장엄하고 웅장했던 돌로미티에서의 5일 여행이 끝났다. 코르티나 담페쪼를 출발하니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돌로미티에서 우리는 베로나로 향했다. 베로나의 한 귀족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감동을 받아 자신의 집 테라스를 줄리엣의 집으로 꾸미면서 줄리엣의 도시가 되었다.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Letters to Juliet)'의 배경이 된 도시기도 하다. 

 2013년, 친구들과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왔을 때 베로나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 하루를 꼬박 보냈음에도 내 기억 속 베로나는 희미하다. '아레나에서 아이다를 봤다' 정도만 기억하고 있을 뿐, 전체적인 도시의 특징은 어땠는지, 분위기는 어땠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등등 세세한 일들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베로나 방문은 처음처럼 느껴졌다. 

 산악지대여서 사람이 비교적 적었던 돌로미티와 달리 베로나는 도시 입구 초입부터 북적북적했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도시답게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들이 도처에 있었고 유적에서 나온듯한 돌 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젤라토를 먹고 있었다. '로마시대 유적을 의자로 쓰다니!' 땅만 파면 유적이 나온다는 이탈리아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베로나의 주 광장 중 하나인 에르베(Erbe) 광장으로 가는 길은 돌로미티 트레킹보다 험난했다. 수많은 인파에 휩쓸렸다. 가장 유명한 장소인 줄리엣의 집은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사진 찍을 장소도 마땅치 않아 지나가면서 힐끔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줄리엣의 집


 많은 사람들을 뚫고 마침내 에르베 광장에 도착했다. 빨간 벽돌들과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대리석으로 된 건물들이 이 도시의 나이를 짐작하게 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광장을 빠져나와 베로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 피에트로 성(Castel San Pietro)으로 향했다.  

 피에트라 다리를 지나 피에트로 성 쪽으로 가면 전망대에 올라갈 수 있는 푸니쿨라가 있다. 부모님의 무릎 보호를 위해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천천히 이동하는 푸니쿨라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가니 뜨거운 햇볕 아래로 베로나와 베로나를 휘감고 있는 아디제(Adige)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주황색 지붕들과, 고대, 중세의 교회들, 첨탑들을 보고 있으니 '이게 진짜 유럽이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 중세의 느낌을 그대로 갖고 있는 베로나 시내 구경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구글 지도에서 내가 먹고 싶은 라비올리(이탈리아의 만두 같은 파스타)와 동생이 먹고 싶은 피자를 같이 파는 아레나 광장의 뷰 맛집 식당에 도착했다. 아레나 광장 밖에 자리 잡은 많은 사람들을 보자마자 아빠가 사람이 많은 곳은 싫다고 아레나 광장에서 안 드시겠다고 하셨다. 플랜 비가 없었던 우리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서 다시 열심히 검색을 시작했다. 10분 정도 검색한 결과, 라비올리는 없지만 피자와 다양한 종류의 파스타가 있는 한 골목 안의 식당을 찾아냈다. 다행히 두 번째로 선택한 식당은 성공이었다! 토마토 파스타는 해물이 듬뿍 들은 데다 뜨끈해서 아빠의 입맛에 딱이었고 트러플 리조토는 트러플 향이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외쳤다. 문어 샐러드의 문어는 부드럽고 야들야들해서 평소 해산물을 좋아하는 엄마가 특히 좋아했다. 모두가 만족한 저녁을 먹으니 어려운 게임의 퀘스트를 하나 깬 것처럼 뿌듯했다. 

 저녁을 먹고 드디어 대망의 오페라를 보러 아레나로 향했다. 우리가 오늘 볼 오페라는 베르디의 나부코(Nabucco). 바빌로니아 왕 나부코의 이야기다. 표를 pdf로 받아 들어가는데 마치 2013년 전 아이다를 볼 때로 돌아온 것 같았다. 베로나에서 무엇을 봤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아레나는 어떤 길을 따라서 왔는지 등등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하지만 아레나를 마주하자 몇 번 문으로 들어갔는지, 그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기억이 막 시작된 불꽃처럼 머릿속에 나타났다. 몇 천 년 된 돌계단들을 하나씩 걸어서 올라가다 커튼을 걷을 때 느꼈던 설렘.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나오는 아리아. 도시의 나이만큼 된 관중석에 앉은 많은 사람들, 마이크도 없는 가수들이 부른 노래가 내가 앉은 먼 자리까지 들려올 때의 신기함 등이 아레나에 들어서자 떠올랐다. 

 친구들과의 첫 유럽 배낭여행 이후 8년 만에 다시 온 베로나. 돈을 아끼기 위해 하루 종일 맥도널드 햄버거 세트나 마트 빵만 사 먹던 대학생에서 부모님께 제법 근사한 식사를 대접해 드릴 수 있는 내가 되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왔으니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겠다고 아무도 없는 밤의 베로나 역에서 독일로 향하는 야간열차를 기다렸던 20대에서 여유롭게 관광하다가 체력이 달리면 젤라토도 사 먹고 원래 일정에 없던 서점에도 들어가 보는 30대가 되었다. 흔한 말로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레나로 돌아오니 예전의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이 신기했다. 이전의 추억을 다시 생생하게 불러들일 수 있었던 까닭은 몇 천 년이 지나도 모습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아레나의 마법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뽀제이 엄마의 여행 팁

1. 줄리엣의 집 앞에 사람이 많아도 정원까지는 돈을 내지 않고 들어갔다 나올 수 있다. 티켓 사는 줄과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들이 엉켜 사람이 더 많아 보이니 들어가 보고 싶다면, 티켓 사는 줄을 피해서 들어갔다 나오면 된다. 

2. 아레나의 오페라는 항상 관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6월부터 9월까지는 오페라 축제를 하고 그 외에는 홈페이지에서 프로그램을 확인해야 한다.

3. 피에트로 성의 푸니쿨라 도착지의 매점에서 시원한 병맥주를 판다. 예쁜 베로나 마을을 보며 감성을 충전하고 싶다면 맥주를 사 마셔도 좋다.  


투제이 실무의 여행 팁

1. 피에트로 성은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지도 않고 높이도 높지 않으므로 푸니쿨라는 굳이 타지 않아도 된다.

2. 오페라 축제 기간에도 오페라를 보기 위해서는 미리 예매를 해야 한다. 만 나이로 24~30세 사이는 티켓 할인도 받을 수 있다. 

3. 오페라 티켓을 예매해도 당일에 비가 오면 얄짤없이 취소된다. 2022년 8월의 기준으로는 비가 와도 취소는 되지 않는다. 극의 시작 시간에 비가 오면 최대 150분까지 연기된다. 150분 연기 후에도 비가 내린다면 해당 연도의 축제기간 중 다른 날의 티켓으로만 교환이 가능하다. 1막 끝나기 전에 비가 와서 공연이 취소된다면 다른 날 같은 좌석의 티켓을 50퍼센트 해주는데 오페라 축제 기간 내내 베로나에 있을 것이 아니라면 마음 아프지만 포기해도 된다. 좋은 좌석이 아니더라도 소리는 잘 들리므로 일기예보와 프로그램을 확인하여 예매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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