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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목나무와 매미 Nov 29. 2022

세상에 완벽한 여행 메이트는 없다

할 수 있다, 부모님과 유럽여행-절망 편

 몇 년 전 직장 내 커뮤니티에서 '가족여행 서약서'가 소소하게 인기를 끌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갈 때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님이 지켜줬으면 하는 것을 서약하는 것이었다. 관광지나 금액에 대해 불평하지 않기, 서로에게 인신공격하지 않기 등의 내용이 있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에 가본 사람들은 모두 그 서약서의 내용에 공감하며 빵 터졌다. 나도 지난 몇 번의 여행 중 비슷한 이유로 부모님과 갈등을 겪은 적이 있었기에 그 해에 가족 여행을 가기 전에 부모님께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했었다. 

"서약서에 사인 안 해주면 안 갈 거야."

 가족 여행을 다니면 크고 작은 이유들로 크고 작은 갈등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몇 개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장소 : 코르티나 담페쪼의 호텔   

     주요 등장인물 : 아빠   

 우리가 코르티나 담페쪼를 방문한 8월 중순은 돌로미티 여행 극성수기였다. 4달 전에 숙소를 예약하려 했지만 마땅한 숙소가 없었다. 그래도 운이 좋게 근처의 뷰가 좋은 호텔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예약했다. 오래됐지만 아늑한 느낌의 호텔이었다. 시간이 늦어 주변에서 식당을 찾을 수 없었던 우리는 숙소에서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기로 했다. 햇반과 컵라면을 데우는데 아빠가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호텔은 샤워실이 왜 이렇게 작냐, 콘센트가 왜 이렇게 없냐 등등. 사소한 것들을 모두 꼬투리 잡았다. 작은 냉장고를 보며 한 소리를 하는 아빠를 보며 엄마가 "냉장고에 넣을 음식이 많지 않아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이야기를 하자 아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냉장고에 2L 생수도 안 들어가는데 이게 어떻게 괜찮아!" 아빠의 신경질에 나머지 가족 셋은 벙쪄버렸다. 결국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아빠가 소리 지른 것이 미안해졌는지 슬그머니 성질을 부려 미안하다고 사과하셨다. 그 후에 아빠가 화를 낸 이유에 대해서 말을 하셨다. 아빠는 며칠 동안의 등반 동안 입었던 옷을 빨고 싶었는데 호텔에는 옷을 빨아 널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빨래를 둘 곳을 미리 알아보지 않고 옷을 적셔서 신경질이 나 있었는데 거기에 냉장고의 물통까지 계속 쓰러져 냉장고 문이 닫히지 않으니 부글부글 끓던 화가 입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아빠의 사과에 우리는 괜찮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빨래가 널 곳이 없다고 성질이 나다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두 번째 에피소드>  

     장소 : 베로나의 아레나 광장   

     주요 등장인물 : 아빠, 나, 동생   

 베로나 아레나 광장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감생감사(감성에 살고 감성에 죽는) 동생은 유럽에 왔으니 무조건 야외 테라스에서 유럽의 분위기를 느끼며 저녁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베로나 여행 시작 전에 내가 먹고 싶었던 라비올리, 아란치니와 아빠가 먹고 싶은 다양한 종류의 파스타를 파는 아레나 광장의 식당을 조사해 두었다. 베로나 구경을 마치고 찜해두었던 식당으로 갔다. 아레나가 보이는 명당에 자리를 잡은 만큼 사람이 많았다. 야외에 앉을 곳이 있는지 서버에게 물어보는데 "사람 많은 데 싫어, 다른 곳 가자" 아빠가 식당을 보더니 이야기했다. 야외에서는 괜찮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둘 다 파는 곳은 이 식당밖에 없다 등등의 말로 아빠를 설득하려 했으나 아빠는 단호했다. "사람 많은 곳은 코로나 때문에 무서워."

결국 동생과 나는 그 자리에서 좀 한적한 곳의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아란치니와 라비올리가 먹고 싶어 관련 식당을 찾았는데 동생은 엄마는 피자를 좋아한다며 피자를 파는 식당 위주로 찾았다. 결국 '엄마가 좋아한다'는 동생의 말에 굴복해 아란치니를 포기하고 피자와 파스타를 파는 식당에 갔다. 자리에 앉으니 동생이 엄마한테 "엄마 피자 좋아하니까 많이 드셔"라고 말했다. 엄마는 "엄마 피자 엄청 좋아하지 않아, 꼭 피자 안 먹어도 돼."라고 대답했다. 엄마의 말에 나는 동생을 흘겨봤고 동생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란치니......... 이탈리아에서 제대로 된 아란치니를 먹어보지 못한 게 아직도 가슴속 한 구석에 남아있다. 

<세 번째 에피소드>

장소 : 친퀘토리를 보고 내려오는 케이블카

주요 등장인물 : 아빠, 엄마, 나, 동생


 아빠의 취미는 베이킹, 자전거 타기, 사진 찍기, 그림 그리기다. 아빠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매우 놀랍다. 히말라야 트래킹을 갈 때도 무거운 사진기와 삼각대는 꼭 들고 갔다. 미국의 모뉴멘트 밸리의 사진을 남기겠다며 눈 오는 2월 새벽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3시간 동안 기다린 적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아빠의 사진 찍기는 대단했다. "거기 스봐~('서 봐'의 충청도 방언)" 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오면 우리는 아빠의 '스봐~'소리에 멈춰 서야 했다. 가족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사진기 세팅하는데 5분, 마음에 드는 컷이 나올 때까지 10분, 한 번 서면 기본 15분은 가만히 서서 기다려야 했다. 동생이 한 마디 했다. "아빠는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카메라에 비친 풍경만 보나 봐." 아빠도 대꾸했다. "뭐 사진을 아부지만 위해서 찍나." "그건 아니지, 그래도 너무 자주 멈춰 세우잖아." 아빠랑 동생이 여러 번 말을 주고받았다. 결과는 아빠의 승리였다. 우리는 여행 내내 하루에 15번도 넘는 '스봐'소리를 들어야 했다. 

 다른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자식이 계획을 짜서 부모님을 모시고 간다. 문제는 부모님이 모시고 간 식당이나 관광지에서 불평불만을 해서 자녀가 속상할 때다. 본인이 가고 싶은 곳보다 부모님이 좋아하실 만한 곳을 열심히 찾아 모시고 갔는데 기대했던 만큼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으니 얼마나 보람이 없겠는가. 다행히 우리 집은 계획은 아빠의 취향을 고려해서 엄마가 짜고 나머지 가족들은 계획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여행 가서 통역, 계산 등의 실제적인 일들은 내가 하다 보니 자연히 부모님의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음식을 하나 먹어도 부모님의 입맛에는 잘 맞는지, 숙소를 정해도 침대는 편안한지 등 부모님의 반응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지구상에 완벽한 여행 메이트는 없다. 혼자 다녀도, 친구와 다녀도, 가족과 함께 다녀도 불편한 부분들은 있다. 혼자 다니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여행할 수 있지만 좋은 풍경과 나의 감상을 공유할 사람이 없어 외롭다. 친구와 함께 다니면 외롭지 않고, 인생 샷을 서로 찍어줄 수 있지만 음식, 호텔, 관광할 곳까지 취향을 맞춰야 한다. 가족들과도 마찬가지다. 신기한 건, 절연할 정도의 사건이 아니고서는 이런 갈등들이 대부분 미화되어 오래 기억되는 추억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에 다녀온 지 3달이 된 지금 첫 번째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때마다 아빠는 '성질낸 거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럼 뭐가 성질인데'하면서 농담하며 넘어간다. 다른 갈등 에피소드들도 나중에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기억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다음에는 또 어디로 여행 갈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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