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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목나무와 매미 Mar 04. 2023

이웃집 차페크씨의 정원 일기

<정원가의 열두 달>(펜연필독약, 2022)를 읽고


 얼마 전 디지털 디톡스 및 힐링을 위해 춘천에 있는 북스테이를 찾았다. 숲속의 공간이어서 그런지 북스테이에는 식물과 관련된 많은 책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책들을 살펴보던 중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체코의 국민작가인 카렐 차페크(1890-1938)였다. 카렐 차페크는 '로봇'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작가로 유명하다.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도롱뇽과의 전쟁> 등의 SF 작품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열정적인 정원가였다는 사실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정원가의 열두 달>(펜연필독약, 2022)은 정원가가 한 해 동안 달별로 어떤 일을 하는지와 각 달에 대한 작가의 단상을 쓴 책이다. 호기심에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의 내용이 너무 좋았다. 따로 가져간 책은 잊었을 정도였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작가 카렐 차페크의 유머러스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무심히 툭툭 던지는 듯한 문장들이지만 읽다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특히 생활 속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대상을 소재로 유머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 책이 나온 지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공감하며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까탈스러운 날씨를 단번에 뒤바꿀 수 있는 비법이 존재한다. 예컨대 '내일은 옷장에서 가장 두툼한 외투를 꺼내 입어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날이 밝기가 무섭게 기온이 오른다. 

카렐 차페크, <정원가의 열두 달>, 펜연필독약, 39쪽

  둘째, 자연과 주변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자신이 키우는 다양한 식물들과 이웃을 바라보는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훈훈해진다. 


이웃 사람들도 명백한 봄의 신호다. (중략) 그럼 또 그의 모습을 보며 그의 이웃도 봄이 왔다는 걸 알게 되고, 서로 서로 담장 너머로 기쁜 소식을 주고받는다.

카렐 차페크, <정원가의 열두 달>, 펜연필독약, 51쪽


 마지막으로 정원을 통해 우리 삶에 대한 통찰과 희망을 준다. 정원 가꾸기는 우리의 삶과 같아서 고되기도 하지만 보람차기도 하다. 더 많이, 크게 키워보려고 욕심을 부려보기도 하고 처참히 실패해 보기도 한다. 망쳐버린 정원을 보면서 신세를 한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카렐 차페크가 보여준 정원가의 한 해 살이는 힘든 우리에게 현재의 희망을 준다. 


사람들은 스러져버린 과거의 잔여물이 풍기는 쇠락의 냄새는 곧잘 맡는다. 하지만 이처럼 노쇠하고 헐벗은 땅속에서 끝없이 움트는 하얗고 통통한 새싹은 왜 보지 못하는지!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순간이다. 

카렐 차페크, <정원가의 열두 달>, 펜연필독약, 186쪽


 출간된 지 거의 100년이 넘은 책이지만, 읽다 보면 내가 작가의 정원 옆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며 가며 차페크 씨와 날씨에 대한 재밌는 농담도 나누고 다양한 꽃 종류도 물어보면서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일상의 평화로움을 느끼는 동시에 알록달록한 정원의 이미지와 따뜻한 글들로 힐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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