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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목나무와 매미 May 07. 2023

100년 동안 지속되는 여성들의 분투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작가정신, 2022)를 읽고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작가정신, 2022)는 1920~30년대에 활동했던 백신애 작가와 현재 활동 중인 최지영 작가의 글들을 묶어 낸 책이다. 표제작인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는 최진영 작가가 백신애 작가의 <아름다운 노을>을 변주하여 쓴 글이다.

 백신애 작가의 소설들은 일제 강점기에 가부장적인 인습과 일제의 탄압이라는 두 가지 억압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핍박 아래서 남편을 위해 매일 찬물 목욕을 하는 등 가정에 헌신했지만 결국 남편에게 버림받는 여성이 있다(<광인 수기>). 그럼에도 이 여성은, 바람을 피운 남편이 오히려 자신을 정신질환자로 몰아가면서 "영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가정으로 돌아간다.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서다. 그런가 하면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여성도 있다(<혼명에서>). 이 여성은 이혼 후에 주변으로부터 '여성답게' 얌전하고 조신하게 남편의 사랑이나 받으면서 살아가라는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이 압박을 뿌리치고 자신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나를 속이지 않는,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그렇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마음으로서 뜻한 바 길을 매진한다!"

백신애, <혼명에서>,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98쪽

 마지막으로 뮤즈와 사랑에 빠지지만 나이 차이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성 예술가가 있다. 과부라는 사회적인 시선과 '어머니'의 고정 역할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계속 부정한다. 하지만 뮤즈를 향한 마음은 더 커져만 간다. 그는 "병원에서 빠져나온 후 오늘까지 몸을 숨겨 깊은 산골과 인적 없는 벌판을 헤매며 그래도 씻지 못할 괴로움을 씻으려 괴로움과 싸"(188쪽) 우고 있다. 자신의 사랑과 계속 싸우고 있는 것이다.

 최진영 작가의 소설에서도 경제난, 사회적인 편견과 싸우고 있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돈을 벌기 위해 언제고 여성을 대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폭력을 두려워하며 일하는 20대 여성. 남편과 헤어진 후 이혼한 여자에 대한 편견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여성. 백신애 작가의 소설들이 출판된 지 1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그들을 향한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한다.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은 생존 다음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집의 여성의 모습에서 우리는 희망을 느낄 수 있다. 치열하게 삶을 이어가는 여성들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사회, 차별 대우에 맞서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끈기,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내가 여기에 있다"라는 존재감을 자신들의 분투로 증명하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여성들이 100여 년 전에 나온 백신애 작가의 소설들에 등장한 사회적인 장애물들을 맞닥뜨리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하지만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의 순희와 정규처럼 여성들은 속도는 느리지만 그들만의 노력으로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연대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투 운동처럼 핍박받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깨지지 않을 유리 천장들에도 미세한 금들이 생기고 있다.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는 여성들이 나아가는 길들을 응원하며, 여성들의 분투를, 강인함을, 생명력을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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