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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AXO Jun 21. 2019

4. 자아성찰을 너무 열심히 할 때

Bea miller - I can't breathe

고장 난 느낌


 성인애착 유형에 따르면 회피성 애착은 크게 공포형 회피 애착과 거부형 회피 애착의 두 가지로 분류된다. 공포형 회피 애착은 자기부정-타인부정의 유형으로, 남들과 가까워지면 왠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거부형 회피 애착과 비슷하지만, 남들과 가까워졌을 때 자신이 크게 상처 받을까 봐 걱정한다는 것이 조금 다른 점이다. 또한 남들과 정서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원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남을 완전히 신뢰하거나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건 또 어려워한다는 특징이 있다.

 반면 거부형 회피 애착은 자기긍정-타인부정 유형으로, 남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는' 상태를 편안하게 느끼는데 그 이유는 바로 '독립심과 자기 충족감'을 느끼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남에게 의지하거나 남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을 모두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가 의존적인 모습을 보일 때 비판하는 행동이 자연스럽고, 자기 자신의 욕구 충족과 성공 등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나는 평소 거부형 회피 애착에 가깝고 나의 높은 자존감과 독립성에 은근한 자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따금씩은 과도한 자아성찰의 결과로 고장나버리는 때가 있다. 나의 미성숙한 부분들, 불안정한 파편들을 새록새록 발견하고 이것들을 문제로 인식할 때, 그리고 도저히 혼자서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고 여길 때 공포형 회피 애착의 면모가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자기부정에 시달리다 심적으로 버거울 때는 응당 나를 도와줄 다른 이를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결국 거부형 회피 애착으로 돌아와 버리고 마는 것은, 기댈 사람을 찾을 바에야 내게 있는 문제를 외면하는 쪽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컨트롤하기 더 쉬운 게 흔히 나 자신의 마인드셋이다 보니 '이 정도는 별거 아냐'하고 멀쩡한 척 덮어둔 채 일상으로 복귀한다. 속은 곪아있는데.


 여자는 여자에게 너무 엄격하다


 역시 내 탓이오 하는 건 나와 맞지 않다. 회피형은 사실 남 탓으로 악명이 높지 않던가. 그러니 이번에는 괜히 내 속을 후벼판 '자아성찰'이란 놈 자체를 탓해보자. 물론 걸어온 길을 돌아볼 줄 아는 인간임은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성찰이 이정표로서 날 이끌어주는 게 아니라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힘에 부치게 하는 모래주머니처럼 내게 매달려 있을 뿐이라면, 떨쳐낼 줄 알아야 한다.

 도대체 누가 당신에게 그 잘나신 '완벽함'을 강요하는가? 많은 경우에 당신에게 그토록 혹독한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일 것이다. 남과 비교했을 때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성취를 거두면서 명성과 평판에까지 흠집 하나 없길 바라는 것, 정작 그 어떤 타자에게도 기대하거나 바라본 적이 없는 것을 스스로에게 바라고 있을 터이다.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남한테 관대한 만큼 스스로에게도 너그러워져야 한다.

 어쩌면 당신은 자기 자신을 꼼꼼하게 검열하도록 사회화된 것일 수도 있다. 세상은 여성의 잘못을 확대하고 여성의 성과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사실 이러한 경향은 집 밖이나 안이나 마찬가지이다. 나는 딸에게 더욱 박하고 냉정한 엄마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발견했다. 그 모든 훈계가 그저 애정표현이고 당신을 성장시키는 피드백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엄마는 엄마이기 전에 적어도 나보다 이삼십 살은 많은 어른이고, 다시 말해서 나는 세상 경험이 그만큼 적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어찌 그 기대치를 다 충족시킬 수 있단 말인가. 때리는 것만이 폭력이고 학대인 것은 아니다. 그저 입맛대로 조종하고 휘둘러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게 과연 나를 사랑하기 때문일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딸들이여, 조금 더 당당하게 실수하고 방황합시다. 온실 밖을 어슬렁거리며 밥 잘 먹고 똥 잘 싸면 박수받는 강아지들처럼 게으름도 좀 피워봅시다. 뭐 어때요.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아직 걸리는 게 남아 있다면 글쎄, 이렇게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누구나 가슴속에 풀지 못한 숙제 하나쯤은 갖고 산다. 그러니 깊게 생각하면 골치만 아프고 정신건강에도 해롭다. 지금 당장 산적해 있는 것들까지 미뤄두고서 그것만 붙잡고 있을 만큼의 가치가, 아니 그렇게 한다고 해서 소용이 있는 일인지를 고민해보자.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우선 다른 것들을 처리한다.

 바꿀 수 없는 나를 미워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기에 나 자신은 소중하다. 다른 모두가 날 떠나더라도 나만큼은 나를 거두고 나를 돌볼 것 아닌가. 또한 약점은 약점으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관점을 달리하고 해석을 달리하면 강점이 되기도 한다. 수동적인 면? 그만큼 신중한 것이다. 덜렁대는 것? 좀 인간적인 매력이지.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하는 게 있다면 약점은 가능한 숨기고 강점은 최대한 드러내는 방법들이다.

 이번 글은 철저히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나와 닮은 회피형 당신들을 위해서 썼다.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문제로부터도 숨 가쁘게 도망 다녀야만 하니까. 도망치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꼼짝없이 내 안에 갇혀버렸다. 그런 순간에 내가 내 안을 긁어내려 가는 것은 참 비참하더라. 우리가 언젠가 너무 막다른 곳에 이르는 일이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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