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레오폴트가 현대의 타이거맘 헬리콥터맘을 연상시킨다고 적고 있다.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와의 분리를 인정하지 못했다. 부자의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p.160. 평생 아들의 성공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레오폴트는 모차르트를 놓아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레오폴트와 모차르트가 21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부자를 분명히 s본부 영재발굴단에서 볼 수 있었을 게다?
2년 넘게 함께 일했던 음대 출신 PD가 한 얘기가 떠오른다.
“영재요? 영재면 뭐요? 예고? 음대?에 들어가보니 영재가 아니었던 친구들이 드물 정도였어요. 그들은 빨랐을 뿐이지. 특별하지 않았어요. 20살에 한 대학에서 만난 수많은 영재들은 다 그렇고 그런 아이들이었죠.”
그렇다. 걸음을 빨리 뗐다고 누구나 '우사인볼트'가 되는 것도 아니고, 글자를 먼저 깨쳤다거나 말문이 일찍 쫌 트였다고 해서, 특별히 글재주나 말재주가 있는 건 아니니깐.
교육당한 영재인지, 타고난 영재인지.
어느쪽이든, 모차르트 짧은 생애의 말년은 불행했다.
p.272 "모차르트의 삶이 음악에 봉사한 것이지 그의 음악이 삶에 봉사한 것이 아니다"-신학자 바르트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추측과 억측. 특히 영화 '아마데우스'로 인해, 살리에르가 음악적 열등감으로 모차르트를 살해한 것으로 표현되지만, 오늘날 모차르트의 죽음은 병사 쪽이 더 설득력있어 보인다.
p. 281 "황제 요제프 2세는 1784년 장례 절차 간소화를 지시하는 일종의 가정의례 준칙을 공포했다. 조문행렬이 마차를 뒤따라가는 전통을 없앴고, 시신을 자루에 담아서 매장하는 방식도 명문화했다~시신은 6구까지 공동 매장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의 경우에도 성인 2명, 유아2명의 시신과 함께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이 대목에선 참으로 애잖했다. 그래도 명색이 모차르트인데, 마지막 가는 길이 이렇게 쓸쓸할 수가. 누구하나 묘지까지 따르는 이 없이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모차르트의 시신은 여즉 찾지 못한 채로, 기념비만이 그를 대신하고 있다.
클래식에 대한 ‘앎’을 원했던 건, 오선지에 대한 고상한 갈망 때문은 아녔다. 지식 차원의 현학적 발로였으리라.그럼에도 클래식클라우드 모차르트를 읽는 내내, 평소 귀에 익었던(몇 안되지만) 그의 음악들이 궁금해졌다. 글로 읽고, 음악으로 만나는 모차르트는 어떤 음악가일까...사회학자 엘리아스는 모차르트를 일컬어, 낭만주의 작곡가들(베토벤 등)보다 앞서 그들의 삶을 살고자 했던 시대의 ‘선구자’나 ‘척후병’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이 나에게만 쓸쓸하게 전해졌을까? 이어 베토벤이 궁금하지만, 아직 출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