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한길사
저자는 <한국 독자를 위하여>에서, 한나 아렌트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를 했다.
한나 아렌트는 1975년에 세상을 떠난 이래, 주요 정치사상가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아렌트는 1933년에 독일에서 도망쳐 나와 파리에서 7년간 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시민이 될 때까지 그녀는 18년간 무국적 상태로 지내야 했다. 이런 경험 때문에 그녀는 난민이 처한 곤경에 대해 깊이 이해를 했고 상당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전체주의의 기원』을 썼다. 이 책에서 그녀는 총체적 지배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발성과 개인성의 파괴를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전체주의적 해결책들은 전체주의 정권의 몰락 이후에도 인간에게 가치 있는 방식으로 정치적·사회적 또는 경제적 고통을 완화하는 일이 불가능해 보일 때면 언제나 나타날 강한 유혹물의 형태로 살아남을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저자는 2016~2017년에 있었던 한국의 비폭력적인 촛불시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아렌트)는 18세기 프랑스와 미국에서 분출했던 “혁명정신”이 아주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서 갑자기 그리고 예기치 않게 등장했던 오래된 보물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혁명정신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프랑스 레지스탕스에게서, 1956년에 부다페스트 봉기에서 그리고 미국의 초기 민권운동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최근 한국사에서 나타난 2016~2017년의 비폭력적인 촛불시위 같은 사건들도 공동행위를 통해 권력이 생겨나고 자라나는 현상인 혁명정신의 발현을 보여줍니다.(13~14쪽)
저자는 <서론>에서 최근에 들어와서, 한나 아렌트의 업적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진 이유에 이렇게 설명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두움이 전 세계를 삼키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결론 내리지 않고서는 견디기가 어려울 정도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 하더라도 불빛을 발견하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그 불빛은 이론이나 개념에서 등장하기보다는 개인들의 삶과 일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우리의 정치적 문제들과 당혹스러운 일들에 대해 우리가 비판적 관점을 갖출 수 있게 돕고 있다는 점이다. 아렌트는 근대의 삶에 나타나는 위험한 경향들에 대해 빈틈없이 비판했으며, 정치의 품위를 회복하기 위한 가능성을 비추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아렌트가 읽히고 있는 그리고 읽어야 할 이유다.(19쪽)
이 책에서 저자는 아렌트의 여러 주장을 다루었는데, 그중에서 특히 ‘난민’과 ‘악의 평범성’을 중심으로 읽어보았다.
<난민>
한나 아렌트가 뉴욕에 도착한 후 2년인 지난 1943년, 그녀가 유대인 잡지「우리 난민들」에 기고한 글에, 난민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어 인용해본다.
“우선 우리는 ‘난민’이라고 불리기 원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들은 서로를 ‘신참 ’또는 ‘이주자’라고 부른다(...) 우리와 더불어 ‘난민’의 의미가 변했다. 이제 ‘난민’은 우리 중에 운이 나쁘게도 아무런 생계수단도 없이 새로운 나라에 도착해 난민위원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아렌트가 자신의 동료 난민들과 함께했던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글 「우리 난민들」은 무국적 상태와 난민들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그녀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무국적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현대사의 가장 새로운 대중 현상이며, 국적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점차로 커져가는 새로운 민족의 존재는 현대 정치의 병적 징후를 가장 잘 나타낸다.”
저자는 난민들의 범주와 발생원인 그리고 그들이 존재하는 지역들은 아렌트가 살던 때와 많이 다르지만, 여전히 정치적 사건들 때문에 새로운 무국적 인간 및 난민 집단이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난민의 문제는 전 지구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동안 난민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던 우리에게도, 이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제주에도 예멘 난민들이 상륙했으니 말이다.
난민 문제는 인도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겠지만, 그 규모가 단순하지 않을 때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 어느 때보다 한나 아렌트의 주장과 국내 현실을 균형 있게 수렴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인 듯하다.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라는 이름을 들으면, ‘악의 평범성’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 보고서의 출간으로 전통적인 악의 개념을 전복시켰다.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뉴요커』에 처음 연재되었을 때, 아렌트는 많은 공격을 받았다. 많은 유대인들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이, 수백만 유대인의 절멸을 사소한 것처럼 만들어버렸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괴물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이었다고 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상투어와 ‘언어 규칙’에 사로잡혀 사유를 할 수 없었고, ‘확장된 심성’이 결여됐던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녀의 이런 주장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악의 평범성’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당대의 ‘최악의 범죄자’중 하나로 여겼다.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후기에서 ‘악의 평범성’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재판에 직면한 한 사람이 주연이 되어 연출한 현상을 엄격한 사실적 차원에서만 지적하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품고 있지 않았다······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가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 sheer thoughtlessness 였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실성이 있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평범한 이유에서 악행을 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는 현실을 직면하는 일’이라고 했다.
‘악의 평범성’은 씁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이기 때문이다. ‘악의 평범성’ 개념을 인지하게 된 이후, 그동안 인간들의 의식에 어떤 혁명적인 일이 일어났던가?
이런 의문에 대해 한 번쯤 깊이 있는 사유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옮긴이는 ‘그녀의 사유에서 우리 스스로 사유하고 문제를 고민하는 능력을 길어 올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유’의 문제는 한 사람의 삶에서 국가의 존립에 이르기까지 큰 의미를 가지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사유하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 사유를 둘러싼 파장은 나와 이웃, 그리고 국가, 더 멀리는 전 세계에까지 퍼져나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통해, 사유의 강력한 힘을 발견했다. 이런 개념은 개개인의 삶을 흔들어놓는, 큰 사건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