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바실리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출생으로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률, 정치, 경제를 전공했다. 그는 서른 살 때 장래가 촉망되던 법학 교수 발령을 포기하고 뮌헨으로 가서 그림을 시작한, 특이한 이력이 있었다. 법학도와 화가의 거리는 무척이나 먼 듯하다. 그러나 그는 추상회화 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시킨 추상 미술의 선구자였다.
칸딘스키에 대해 일말의 전문 지식이 없었지만 그가 말하는 예술론이 무척 궁금했다.
막연하게나마 예술은 본래 정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가 말하는 ‘정신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추상적인 면을 주로 표현한 것이기에 예술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그러한 혼란의 와중에서도 강렬하게 와 닿은 부분도 없지 않아서, 그 내용들을 옮겨보기로 한다.
대상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고 이러나저러나 여전히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것을 재현하는 것만이 예술의 목적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무엇’을 표현했느냐 하는 문제는 없어지고,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는 문제만이 남는다. 말하자면 동일한 물질적 대상이 어떻게 예술가에 의해서 재현되는가 하는 방법만이 ‘신조’가 될 뿐이다. 예술은 그 영혼을 잃고 있다.
‘어떻게’에 대한 추구는 계속된다. 예술은 특수화되고 오로지 예술가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예술가들은 일반 대중들이 그들의 작품에 대해 냉담한 것을 불평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대의 예술가들은 대개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고, 다만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평가받는 것이기 때문에, 즉 몇몇 그룹의 후견인들이나 감정가들 사이에서만 찬양을 받기 때문에(경우에 따라서는 막대한 재화를 벌어들이게 되는데!), 외견상으로만 재능과 기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 도전하고, 그래서 쉽게 예술이 정복될 것으로 생각한다. 모든 ‘예술 센터’에는 수천 명의 이와 같은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 중에 대다수는 가슴은 차갑고, 정신은 잠에 취한 채 아무런 흥미도 없이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오로지 새로운 매너리즘만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가운데 ‘경쟁’은 커지고, 성공을 위한 야만적인 전쟁은 더욱더 물질화되어 간다. 작가와 작품에서 야기되는 이러한 예술적 혼란 속에서 우연하게 자기 길을 타개한 소수 그룹은 그들이 승리한 영역에서 자기의 입장을 고수하여 성벽을 쌓아 올린다. 뒤에 남아 있는 대중들은 어리둥절해서 방관하고, 흥미를 잃고 외면해 버린다.
이와 같은 혼란과 무질서와 속된 평판에 대한 우악스런 추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정신적인 삼각형은 막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천천히,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움직여 전진과 상승을 계속하고 있다. (29~30쪽)
이 책은 1912년에 출판되었지만, 현재의 예술 상황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 같아서 몹시 공감했다. 오늘날의 예술은 칸딘스키가 지적한 것처럼 ‘무엇’을 표현했느냐 하는 문제는 없어지고,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는 문제 에만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예술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긴 하지만, ‘내면의 진실’보다는 ‘기술’을 더 우위에 두는 현실이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술가들은 또 나름대로의 고충들이 있겠지만 말이다.
예술가의 자세에 대한 그의 언급에도 역시 공감했다.
예술가는 ‘공인된’ 또는 ‘공인되지 않은’ 형태에 대해서는 눈을 가려야 하고, 시대의 교훈과 소망에 대해서는 귀를 막아야 한다.
그의 열린 눈은 그의 내적 삶의 방향으로 돌려져야 하며, 그의 귀는 항상 내적 필연성의 언어에 향해 있어야 한다. 그때에 예술가는 허용된 모든 수단과, 마찬가지로 금지된 모든 수단을 쉽게 파악할 것이다. (81~82쪽)
그리고 색에 대한 그의 고찰이 무척 흥미로워서 옮겨본다. 예술가들은 심안(心眼)을 가진 천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색은 전형적인 하늘색이다. 푸른색이 극도로 심화되면 안식의 요소가 생겨난다. 검은색으로 침잠하면서 푸른색은 인간적이라 할 수 없는 슬픔의 배음(陪音)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끝도 없고, 끝이 있을 수도 없는 엄숙한 상태로 무한히 침잠하게 될 것이다. 푸른색은 자신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밝은 색으로 넘어가면서 무관심한 성격을 나타낸다. 그리고 높고 밝은 푸른 하늘처럼 인간에게서 멀어져 가고 냉담해진다. 그리하여 색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음향을 상실하고, 드디어 침묵이 정지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그 색을 희게 될 것이다. 음악적으로 표현한다면 밝은 푸른색은 플루트와, 어두운 푸른색은 첼로와 유사하며, 짙은 색조는 콘트라베이스의 경이로운 음향과 유사한다. 그리고 깊고 장중한 형식을 갖춘 푸른색의 음향은 파이프 오르간의 저음과 비교할 수 있다.
노랑은 예민해지기는 쉬우나, 강렬하게 심화해 침잠할 수 없다. 반면에 파랑은 예민해지기 어렵고 강렬하게 상승할 수도 없다.
정반대로 다른 이 두 색을 혼합해 이상적인 균형을 얻은 것이 초록색이다. 여기에서 수평운동은 서로 소멸한다. 또한 원심운동과 구심운동도 소멸하며, 고요해진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논리적인 결론이다. 그리하여 눈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과 마침내 눈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89~91쪽)
밝고 따뜻한 빨강(새턴 레드)은 중간 노랑과 일종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색소로서도 매우 많은 노랑을 가지고 있다), 힘, 에너지, 지향성, 결단성, 기쁨, 승리(완승) 등의 감정을 일깨운다. 빨강은 음악적으로 말하면 완강하게 파고드는 강한 음색과 같은 튜바의 배 음적(陪音的) 음향과 함께 트럼펫의 팡파르의 음향을 상기시킨다. (96쪽)
주황은 빨강이 노랑에 의해서 인간에게로 더 가까이 오게 됨으로써 생겨난 색이며, 다른 한편 빨강이 파랑에 의해서 인간에게서 멀어져 감으로써 생겨난 색이 보라색이다. 즉 이 보라색은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보라색의 근저에 있는 빨강은 차가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빨강이 가진 따뜻함과 파랑이 가진 차가움은(어떠한 처리에 의해서도) 서로 혼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보라색은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의미에서 볼 때 냉각한 빨강인 것이다. 때문에 보라색은 일종의 병적이며, 불꽃이 꺼져 버린 것 같은(석탄 찌꺼기처럼!)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내부에 비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색이 늙은 부인들의 옷에 어울리는 것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은 이 색을 상복(喪服)에 직접 사용했다. 보라색은 잉글리시 호른이나 갈대피리의 음향과 유사하다. 그리고 색의 깊이에서는 목관악기(예컨대 파곳)의 저음과 유사한다. (99쪽)
*예술가들 중에는 안부인사의 물음에 대해 가끔 농담조로 ‘짙은 보라색’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아무것도 즐거운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그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회화는 예술이며, 대체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공허하게 사라질 사물들을 맹목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목적이 있는 힘이다. 또한 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발전시키고 순화시키는 데에(삼각형의 운동에) 기여해야 한다. 예술은 자기 고유의 형식으로써 사물에서 영혼에 이르는 말을 주고받는 언어요, 또한 영혼이 이런 형식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나날의 양식인 것이다.(128쪽)
예술가는 무엇인가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릇 예술가의 임무라는 것은 형식을 지배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만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129~130쪽)
바실리 칸딘스키는 책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 실린 자신의 그림 세 장을 싣고, 스스로 그 그림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141쪽)
첫 번째는 ‘외적 자연’에서 얻은 직접적인 인상으로서, 이 외적 자연은 소묘적· 색채적인 형식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그림을 나는 ‘인상(Impression)’이라 부른다.
두 번째는 내면적 성격의 과정을 주로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거나, 대부분 갑작스럽게 표현하는 것, 그러므로 이 두 번째 것은 ‘내면적 자연’에서 생겨난 인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런 종류를 ‘즉흥(Improvisationen)’이라 부른다.
세 번째는 유사한 방법에 의해 (그러나 특히 천천히) 나의 내부에서 형성되고 있는 표현인데, 나는 이것을 최초의 구상대로 천천히 치밀하게 실험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이 방법에 의한 그림을 나는 ‘구성(Komposition)’이라 부른다. 여기에서는 이성, 의식, 의도, 합목적성 등에 지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이때에 무엇을 결정하는 일은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감정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책의 말미를 맺었다.
나의 의도대로 우리는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구성의 시대에 한층 더 가깝게 접근하고 있으며, 화가는 자기 작품을 구축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긍지를 가질 것이라는 사실(아무것도 설명할 것이 없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 순수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입장과는 반대로)을 말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제 합목적적인 창조의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드디어는 회화에서의 이러한 정신이 이미 시작된 새로운 정신적 영역의 신축(新築)과 직접적인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신은 위대한 정신성의 시대가 지닌 영혼이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해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칸딘스키의 예술론을 제대로 소화해 내기는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가 강조한 예술가의 영혼과 모습을 흐릿하게나마 인지할 수 있었다. 물론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한 정도에 불과했겠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겠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무식해서 용감했던 내 독서 편력의 아릿한 기억 중 하나로 남을 것 같다.
*이 책의 부록으로 칸딘스키의 산문시와 평전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