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이 책은 내게 무척 파격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책 「칼 같은 글쓰기」를 읽은 적이 있었지만,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그녀가 어떤 작가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녀의 연인이었던 마크 마리와 공동으로 쓴 책이다. 왜 책을 공동으로 썼는지 궁금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22살이나 차이 나는 연하의 마크 마리와 연인 관계에 있다. 더구나 그녀는 유방암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만사 다 제쳐두고 병 걱정을 하며 치료에만 전념할 것이다. 그런데 연하의 남자와 열애라니!
두 사람은 정사를 하고 난 후에, 바닥에 벗어던져버렸던 신발과 옷가지 등이 흐트러져 있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고 각각 따로 그 풍경에 대한 자신들의 느낌을 기록했다.
이런 행위에 대해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이해를 하려고 한다면, 아티스트들의 자유분방함 정도로 받아들여야 했다.
아니 에르노는 ‘마그리트 뒤라스 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텔레 그람 독자상’을 수상했고, 소설, 미발표된 일기 등을 수록한 ‘삶을 쓰다’로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된 최초의 생존 작가가 되었다. 이 정도의 유명한 타이틀을 가진 노 작가가, 연하의 저널리스트와의 정사에 관한 이야기와 사진을 실은 책을 낸다는 것은, 프랑스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아직 우리나라의 정서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나이 많은 여 작가는 젊음의 에너지가 필요했고, 연하의 작가는 유명 작가의 능력이 필요했던가? 이렇게 생각하면 이건 너무 통속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들의 이야기가 점점 궁금해졌다. 그들이 찍은 사진과 글을 통해 그들이 했던 사랑과 생각을 천천히 더듬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저녁 식사 후에 치우지 않은 식탁, 옮겨진 의자, 전날 밤 섹스를 하다가 아무 데나 벗어던져 엉켜 버린 옷들, 나는 줄곧 우리 관계의 시작부터 잠에서 깨어나 그것들을 발견하며 매료되고는 했다. 매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각자가 물건을 줍고 분리하며 그 풍경을 허물어뜨려야만 하는 일은 내 심장을 옥죄였다. 단 하나뿐인, 우리들의 명백한 쾌락의 흔적을 지우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9쪽)
아니 에르노가 마크 마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드러내 주는 글이다. 그녀는 그와 열정적인 사랑을 했고, 정사하기 직전의 혼란스러운 풍경- 바닥에 함부로 벗어던진 신발, 옷, 스카프 등이 널려져 있는-을 그대로 놓아둔 채, 그 풍경을 심미적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중에 바닥을 치워버림으로써 그 풍경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심장이 옥죄었다고 했다.
아니 에르노는 열정적인 에너지 덩어리였다. 아니가 마크와 사랑을 할 때가 63세였다. 그녀는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아티스트는 평범한 사람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아주 특별하게 보였다.
이런 나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삶에 무척 충실했고 진지했다. 그녀에게서 암환자의 절망감이 많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그녀의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암 치료 때문에 전신 탈모가 되었고, 그녀의 겨드랑이 쪽에는 카테테르가 삽입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녀는 사랑을 했다. 어쩌면 그것은 죽음을 거부한, 강력한 삶의 의지였을까?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조르주 바타유의 글이 인용되었다.
‘에로티즘은 죽음 속까지 파고드는 생(生)이다.’
이 한 문장이 그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되어 주었다.
아니가 마크에게 그녀가 암에 걸렸다고 말했을 때 마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녀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 같았다. 그렇지만 실화다. 사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정사 후에 왜 바닥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었을까.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에 오래 기억해두고 싶었던 것인가. 우리의 기억은 짧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진으로 그 순간을 기억의 창고에 영원히 저장해 두고 싶었던 것인가.
일단 그들이 쓴 글을 통해서 그들을 이해해보는 수밖에 없겠다.
사진을 보고 아니가 쓴 글
나는 이 사진을 작년 그리고 현재라는 이중적인 시선으로 묘사하려 한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그날 아침, 식사 전 계단을 내려와, 밤의 축축한 기억을 안고 현관 복도에서 봤던 그것이 아니다. 이 장면에는 첫눈에 식별할 수 없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내가 일상을 보내는 장소가 아닌 그곳은 거대한 타일 때문에 훨씬 더 넓어 보인다. 사실은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다. 그저 크기가 왜곡됐고 모든 색들이 강렬해졌을 뿐이다.
나의 첫 반응은, 옷과 속옷으로 반점을 대신한 로로샤흐 테스트를 마주한 것처럼, 물건의 형체 속에서 존재를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에도, 그날 아침에 찍은 사진에도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다. 사진을 읽는 것은 내 기억이 아니다. 나의 상상력이다. 사진이 더는 내 시야에 있지 않도록 반드시 멀어져야 했다. 각색된 기억 속에서 어느 순간 2003년의 봄의 모습이 떠오를 수 있게, 생각마저도 움직일 수 있도록.(24쪽)
사진을 보고 마크가 쓴 글
몇 주가 지나고 사진들이 쌓였다. 모두 몇 십장이 되었다. 즉흥적인 제스처, 사진을 찍는 행위는 의식이 되었다. 그러나 항상 내 물건을 가져올 때, 그 조화로운 형태가 파괴되는 순간에는 성스러운 장소의 유물을 더럽히는 것처럼 매번 내 가슴이 죄어들었다. 우리의 눈에 그것은 예술 작품만큼 아름다웠고, 옷감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색의 혼합은 놀라웠다. 마치 지금은 움직이지 않지만 우리의 몸짓을 영속시키기 위해 서로를 향해 뻗어 나갈 준비가 된 것처럼...... 죄악은 우리가 방금 저지른 일이 아니라 그것을 흐트러뜨리는 행위에 있었다.
나중에 우리는 마침내 인화된 사진들을 보며, 이 첫 번째 사진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복도의 구성’을 떠올리게 됐다.(31쪽)
그들은 40여 장의 사진 중에 14장을 골랐고 완성하기 전까지는 상대에게 보여 주지 않고, 각자 자유롭게 글을 쓰기로 합의했다. 이 규칙은 마지막까지 엄격하게 지켜졌다고 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에서 묘한 슬픔을 느꼈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분명 있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나이와 사회적인 지위를 초월하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해 사랑을 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랑에 대해 타자들이 뭐라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헛된 일일 뿐이다.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모종의 불편함을 느꼈지만, 책을 덮고 나서는, 아니와 마크의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은 간접 경험의 보고(寶庫)다. 나로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할 이야기를 책을 통해서 접했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낯선 타자들의 삶을 읽었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긍정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 영역이 조금 더 확장되었음에 의의를 느꼈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