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이 책의 가제는 ‘니체의 작가들’이었다고 한다. 그 제목이 얘기하는 것처럼, 작가는 니체에게서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루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최후의 유혹』, 서머싯 모옴의 『달과 6펜스』 『인생의 베일』 『면도날』,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등을 다루었는데,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초인 사상’과 ‘영원 회귀’의 개념이 궁금해서 니체 관련 책을 계속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장점은 니체의 어려운 철학 개념을 소설을 통해서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준 데 있다. 그가 다룬 작품들 중에서 읽은 책도 있었고, 읽지 않은 책도 있었지만, 소설의 줄거리와 내용에 대해 소상히 알려주어서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지만 읽지 않은 책들을 언젠가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의 ‘초인’과 ‘영원회귀’ 사상은 대립되는 개념처럼 보였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차라투스라는 ‘영원회귀’ 사상 때문에 일주일 동안 앓아누웠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근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는 모든 동물들에게 자기가 회복되었고 이런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동물들이 그를 칭찬하며 격려했다.
“보라, 그대는 영원회귀의 교사다. 이것이 이제 그대의 운명이다! 그대가 처음으로 이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 이 커다란 운명이야말로 바로 그대의 최대의 위험이자 병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이라면, 차라투스트라의 복음은 초인이 되라는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영원회귀로 볼 수 있다.
초인과 영원회귀는 모순된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내가 원한다’고 말한다. 즉 운명에 대한 사랑, 아모르파티 amor fati 다. 운명애로 밀고 나가기! 삶을 축제로 만들기!
이것이 니체의 핵심 아이디어다.
예술 작품이 된 삶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읽기
이 책은 예전에 읽고 무척 감명을 받았지만, 니체의 초인과 영원회귀 사상으로 연결해서 읽지는 못했다. 이미 읽은 책을 니체의 개념을 통해 다시 이해해보는 경험은 즐거웠다.
작가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니체의 초인과 영원회귀 사상이 드러난 부분을 발췌해서 보여줬다.
법이 명하는 대로 자진해서 행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현자가 누구였던가? 필연에 순응하고 필연적인 것들은 자유 의지의 행위로 바꾸어 놓으라고 한 사람은?
조르바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붙잡았다.
작품 속 조르바는 실제 모델이 있지만 동시에 변형된 차라투스트라였다.
이 작품에서는 춤이 중요한 의미다. 조르바가 춤추기 시작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그 춤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나라는 놈은 원래가 이렇게 생겨 먹었어요. 내 속에서 소리치는 악마가 한 마리 있어서 나는 그놈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때면 이놈이 소리칩니다. ‘춤춰!’ 그러면 나는 춤을 춥니다. 그러면 숨통이 좀 뚫리지요.(...) 나는 내 불행을 춤으로 추었습니다. 내 편력을 말입니다. 내가 몇 번 결혼한 사람인지, 내가 한 짓, 감옥에 들어간 사연, 탈출한 이야기, 러시아로 굴러들어 온 경위 등등······.”
니체의 초인은 절대적인 주권자, 자유인이다.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사람, 제약받지 않는 사람. 조르바는 카잔차키스가 제시하는 초인이다. 니체는 ‘인간은 초인으로 가는 다리’라고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나’를 통해 이 다리를 보여준다. ‘나’는 카잔차키스이며, 독자이기도 하다. 읽는 독자가 어떻게 초인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소설이다.
일상을 바라보는 냉철함
서머싯 모옴
『달과 6펜스』읽기
『달과 6펜스』는 폴 고갱의 생애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6펜스는 돈을 상징하고, 달은 꿈이나 이상을 뜻한다. 이 작품은 달을 선택했던 천재 화가 스트릭랜드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다.
니체는 예술이 삶에 끊임없이 자극을 준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극이 없으면 타성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통과 많은 변신들이 필요하다(...) 창조하는 자 스스로가 새로 태어날 아이가 되려면, 그 자신이 산부(産婦)가 되어 그 산고를 겪으려 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서머싯 모옴은 스트릭랜드의 삶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삶을 선택하라고 한다. 달 혹은 6펜스를. 다만 둘 다를 선택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주인의 위치에서 아모르파티amor fati의 삶을 살 것인지, 현실의 구속을 받는 노예의 삶을 살 것인지, 그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을 것이다.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읽기
쿤데라는 영원회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두자.
영원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쿤데라는 영원회귀가 가지는 효과를 이 작품에서 충분히 음미하고자 했다. 그는 니체의 사상을 단순히 철학 개념이 아니라 소설 주인공의 삶에 적용해 탐구하고 성찰하게 했다. 즉 독자들이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통해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영원회귀 사상의 쿤데라식 해석이며, 그는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무거운 초인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삶을 그냥 받아들이는 노예의 삶을 살 것인가? 쿤데라는 이러한 두 삶 속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니체의 철학 사상을 소설에 대입해서 읽어본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잠시 내가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딘 듯해서 책을 읽는 내내 두근거렸다.
책 세상에는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숨은 즐거움들이 여전히 많은 듯하다. 그것을 내 삶의 여락餘樂으로 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