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평소에 철학책은 잘 읽지 않는다. 내겐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서모임에서 니체에 대해 공부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혼자서는 엄두를 못 내지만 여럿이 함께라면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펼쳐 든 책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제목은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책이지만, 그동안 감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책이다.
일단 내 힘으로 읽어보기로 했다. 많은 내용들이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극히 일부분만 이해할 수 있었다. 학자들 간에도 이 작품에 대한 의견이 다양한 것을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굉장히 은유적인 잠언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성경이나 불경 등의 경전 같아서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하이데거, 데리다, 들뢰즈 같은 많은 철학자들과 학자들이 이 책에 대한 주해서를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차라투스트라가 읊조리는 아름다운 시들이 내 가슴을 적셔주기도 했다. 이 책은 내게 고통뿐만 아니라 위안도 함께 주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총 4부로 되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 살에 고향을 떠나 산에서 십 년 동안 명상을 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겪고서 산 아래 인간들에게 지혜를 베풀기로 한다. 산에서 내려오던 그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며 신을 찬양하는 늙은 성자를 만났다. 그는 그 성자가 신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한탄했다.
차라투스트라라는 사람들에게 ‘초인(超人)’에 대해 가르쳐 주려고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었다. 그는 자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다시 산으로 갔다. 그는 거기에서 왕들, 거머리와 마술사, 더없이 추억한 자, 스스로 거지가 된 자, 그림자, 나귀와 만나서 대화하며 축제를 벌인다. 그리고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는 징조를 확인한다.
내 생각으로는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초인(超人, Übermensch)’사상이다.
초인은 선악이라는 기존의 범주를 넘어서 삶의 부단한 한계와 제약을 돌파해 나가며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미래의 인간 유형을 말한다.
니체는 “초인이란 고난을 견디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고난에게 얼마든지 다시 찾아올 것을 촉구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고난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 고난을 통해 오히려 더 강해지는 긍정적인 인간상을 말하는 것 같다.
번역자 장희창은, ‘초인으로의 변신은 자기 바깥에 가치의 기준을 두고 그것에 복종해 온 인간이 마침내 노예 생활을 끝내고 자기 가치의 주인이 됨’을 뜻한다고 했다.
여기서 자기 바깥은 종교, 우상, 기존의 사회 관습 등을 뜻하는데, 사람들이 자기 내면에 스스로 확고한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바깥 세계에 의존하거나 얽매임으로써 주체의 삶을 살지 못해 그것들의 노예 노릇을 한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은 ‘초인’과 대립되는 위치에 있는 ‘말종 인간’이다.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노예의 삶을 사는 ‘말종 인간’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사는 ‘초인’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내려와 시장에서 군중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다리〔橋〕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19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말종 인간’과 ‘초인’ 사이에 있는 인간 군상들을 만나고 체험하며 초인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니체는 우리의 힘을 훨씬 능가하고, 절대적이라고 믿는 신이나 우상, 관습, 체제 따위가 사실은 인간의 망상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분신인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신은 죽었다’라고 했다.
차라투스트라가 한 말 중에서 이 의미와 닿아 있는 구절은 아래와 같다.
아, 형제들이여, 내가 꾸며낸 이 신은 다른 모든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작품이자 인간의 망상이었다!
이 신은 인간이었고, 그나마 인간과 자아의 초라한 한 조각일 뿐이었다. 그것은, 이 유령은 참으로 나 자신의 타고 남은 재와 열기로부터 내게 온 것이었을 뿐! 피안으로부터 내게 온 것은 아니었다! (45쪽)
책 말미에 있는 번역자의 작품 해설을 통해, 차라투스트라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의미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을 옮겨본다.
신이라는 폭력, 국가라는 폭력에 의해 수천 년 동안 내면화되고 잠재적인 것이 되어버린 자유의 본능, 억눌리고 뒤로 물러서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만 발산하게 된 자유의 본능, 그것이 양심의 가책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우리 현대인들은 수천 년에 걸쳐 양심을 찢어발기고 자신의 타고난 동물성을 학대한 상속인이다. 요컨대 양심의 가책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매, 타고난 원죄라는 것도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시 극복되어야만 한다.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은 이러한 의미다. 신이 존재하는 것은 그가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빈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인간이 스스로를 빈약한 존재로 오해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등장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577~578쪽)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절대적인 대상을 믿거나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용기가 없는 약한 인간이라고 했다.
고뇌와 무능함. 이것이 그 모든 세계 너머의 세계를 꾸며냈다. 더없이 괴로워하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저 짧은 행복의 망상. 그것이 세계 너머의 세계였다. (46쪽)
그는 인간의 망상이 만들어낸 우상에서 벗어날 때에, 비로소 자유의지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초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비록 삶은 감당키 어려운 것이지만, 사랑하며 살라고 했다.
삶은 감당키 어렵다. 그러나 내게 그처럼 연약한 태도를 보이지 마라! 우리 모두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 있는 귀여운 숫 나귀 들이고 암나귀들이 아닌가.
한 방울의 이슬이 그 몸에 떨어지기만 해도 흔들리는 장미꽃 봉오리와 우리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그렇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65쪽)
그는 삶을 결코 무겁게 살라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처럼 살라고 했다. 아이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걸까?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38쪽)
아이는 말 그대로 긍정의 아이콘, ‘성스러운 긍정’의 표상인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도 그의 시 <무지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는 삶을 즐기라고 했다. 삶을 즐길 줄 모르는 것이 인간들의 ‘원죄’라고까지 했다. 삶을 진정으로 즐기고, 사랑할 때 초인으로 가는 길이 보일지 모른다.
이 세상에 존재한 이후로 인간은 너무도 즐길 줄을 몰랐다. 형제들이여, 이것만이 우리의 원죄다!
우리가 더 잘 즐길 수만 있게 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거나 고통을 꾸며내려는 생각도 가장 잘 버릴 수가 있는 법이다. (152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초인’ 사상 이외에도 ‘힘의 의지’와 ‘영원회귀’ 사상이 나오지만, 그 사상들은 다른 주해서를 통해 좀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책을 읽기는 다 읽었지만, 그저 수박 겉핥기에 머문 듯했다. 철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1부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편에 강렬한 문장이 있어서 옮겨본다.
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가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미워한다(...) 피와 잠언으로 쓰는 자는 읽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기를 바란다.
산맥을 가는 데 있어서 가장 가까운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긴 발을 가져야 한다. 잠언은 산봉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대하고 높이 자란 인간들만이 잠언을 들을 수 있다.(63~64쪽)
이 글을 읽으며 가슴이 뜨끔했다. 내가 너무 쉽게 글을 읽거나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피로 쓴 글! 잠언(산봉우리)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 역시 ‘거대하고 높이 자란’ 사람이어야 한다는 일갈에, 쓰고 읽는 일의 묵직함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독서를 통해서 나의 좁은 시야를 조금씩 벌리는 것은 힘들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은 걸어가거나 춤을 추라는 것이다.
“책 사이에서, 책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사상을 더듬어가는 자들은 아니다. (······) 종이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지 말고, 책 사이로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며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즐거운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