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정재승의 『열 두 발자국』에서 이 책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책 제목이 퍽이나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 책을 선뜻 잡았는데, 왠지 낚인 기분이 들었다. 책 읽기가 그리 쉽지 않았던 것.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은 움베르토 에코가 여섯 차례에 걸친 자신의 강연을 재구성하여 출판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소설을 읽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소설을 쓰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숲은, 한 텍스트가 동화든 다른 어떤 이야기이든, 그 텍스트에 대한 은유’라고 했다.
소설을 읽을 때 소설의 숲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창조된 것이므로, 독자들은 텍스트를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사실들과 감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소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이런 게임의 법칙을 준수해야 하는데, ‘전형적인 독자 Model Reader’는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전형적 작가 Model Author’는 우리에게 다정하게(혹은 오만하게, 혹은 교활하게) 말을 거는 목소리이며 우리가 곁에 있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 목소리는 이야기의 전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리에게 단계적으로 주어지면서 우리가 전형적 독자 노릇을 하려 할 때 준수해야 하는 일련의 명령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
저자는 소설의 숲 속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하나, 또는 몇 개의 길을 가보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숲을 걸으면서 왜 어떤 길은 이용할 수 있고, 또 어떤 길은 이용할 수 없는지 알아보는 방법이다.
한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려면 대개 그것을 한 번 읽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전형적 작가를 찾아내려면 텍스트를 여러 차례 읽거나, 심지어 한없이 읽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전형적 작가를 찾아내고 그가 독자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했을 (혹은 단순히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에 한해서 경험적 독자는 본격적으로 전형적 독자가 될 수 있다.(52쪽)
소설에서 작가가 지루할 정도의 긴 묘사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독자들은 소설의 숲 속에서 특별한 목적 없이 서성이며 기웃거리며 산책을 하거나, 가끔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런 머뭇거림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산책 inferntial walks>을 하게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작가가 전형적인 독자에게 바라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그런 추론적 산책의 시간을 가지게 함으로써, 작가가 의도한 텍스트의 감상에 필요한 어떤 리듬 속으로 독자들이 빠져 들어가기 때문이다.
에코는 묘사에 있어서의 서성거림이 또 다른 기능을 가지기도 한다고 했다. 그는 그것을 <암시의 시간 hint time>이라고 불렀는데, 성경을 한 예로 들었다. 성경에서 옷, 건물, 향수, 보석 등과 같이 사소한 것들을 묘사하는 데에 많은 어휘들을 동원하며 시간을 지체하는 순간들은, 성경을 우의적(寓意的)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을 때 그 내용이 상상의 이야기이지만 작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허구적 합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이야기에 공감을 하게 된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그 내용이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의 뇌는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실제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생각해보면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다.
에코는 ‘허구(虛構)를 읽는다는 것은 실제 세계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방대한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놀이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그런 허구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독자는 현실의 불안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은 이야기의 중요한 기능이며, 사람들이 태초부터 이야기를 했던 이유라고 한다.
저자는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소설이 우리에게 사실의 개념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세계 속에서 산다는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허구가 현실보다 형이상학적으로 더 편안함을 주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했다. 암호 해독자들에게는 황금률이 있는데, 모든 비밀의 메시지는 그것이 메시지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한, 해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허구는 우리들에게 세계를 인식하고 과거를 재구성하는 능력을 무한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준다. 그것은 놀이와 똑같은 기능을 갖는다(...) 우리 성인들이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형성하는 능력을 연습하는 것은 허구를 통해서이다.(232쪽)
어쨌든 우리는 허구적 이야기들을 계속 읽을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의 생존에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방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평생 동안 왜 우리가 태어났고 살아왔는지를 말해 주는 우리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찾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우주의 이야기를 찾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자신의 사적 이야기(우리가 고해 신부나 정신분석학자에게 말하거나 일기장에 쓰는)를 찾기도 한다. 때로는 우리의 사적 이야기가 우주의 이야기와 일치되기도 한다.(247쪽)
그는 소설 읽기의 여러 전략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작품들의 예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예시의 문장들은 소설의 숲에서 독자들이 자주 헤매게 했다. 여기저기를 계속 기웃거리게 만드니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것 역시 에코의 안개 전략이 아니었나, 의심스러웠다.
사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전형적 작가의 책을 전형적인 독자가 읽을 때 책 내용을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 속의 지루한 묘사나 시간 끌기의 전략은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데, 작가가 의도하는 분위기에 충분히 빠져야 한다는 것과 그 부분을 특히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허구의 세계를 다루는 소설을 우리가 읽는 이유는 불안한 현실세계로부터 잠시 벗어나 안정을 느끼고 싶어서라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 나니 좀 허무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 삶도 그러하지 않나. 지나고 나면 별것도 아닌 것을, 그 순간에는 얼마나 불안해하고 가슴 졸였던가.
허구의 이야기가 주는 위안에 귀 기울이고, 자기 가슴을 내어주며, 우리는 고달픈 현실을 그럭저럭 헤쳐 나간다. 생각해보면 이야기의 위안이 결코 작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계속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