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앎으로써 삶을 바꾸는 나의 첫 페미니즘 수업
저자의 프롤로그 제목은 ‘나는 왜 마흔이 넘어 페미니즘을 공부하기로 했나’이다. 제목이 던지는 궁금증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경험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재발견하는 일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내 삶의 고민과 의문과 바람을 설명해줄 언어가 ‘페미니즘’에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어버렸고 이제 이것을 내 이야기로 고쳐 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고쳐 읽으면 고쳐 쓰지 않을 수 없다. (8~9쪽)
이 책이 페미니즘의 사상적 발전의 흐름을 보여준다거나 주요 주제들을 묶어서 엮은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의 경험이 그렇듯 내 경험 또한 특수하고 제한적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고 그저 아내이자 엄마, 평범한 생활인으로서 나의 맥락 안에서 이해한 페미니즘에 대해 쓰고자 했다. 즉, 이 책은 페미니즘에 관한 여러 문장들을 나의 콘텍스트 안에 위치시키면서 엮은 아주 사적인 독서일기인 셈이다. (9~10쪽)
그리고 저자는 공부의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직장맘으로서의 고충과 애환이 느껴졌다.
어쩌면 나를 페미니즘 공부로 이끈 이유는 콜린스 식대로 말하자면 ‘객관적인 사회인으로서 내가 받은 교육과 대한민국 여성으로서 나의 일상적 경험이 삐걱거리며 충돌한다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저자가 페미니즘을 알기 위해 스스로 읽었던 여러 책들의 기록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는 책들을 소개했고 또 그 책에 대한 그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렴풋하게나마 페미니즘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미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저자는 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과 하루카 요코의《나의 페미니즘 공부법》를 읽고 깜빡 놀랐다고 했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신기했다고 한다.
이 두 저자들은 자신의 삶 속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공부’를 택한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들은 결국 삶을 바꿔보려는 발버둥에 관한 이야기이자, 공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주제는 결국, 앎이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맞닿는다. 배운다는 것은 무엇이고 지식은 무엇인지, 지식이 그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앎은 어떻게 삶의 도구가 되는지에 관한 생생한 체험 보고서인 것이다. (25쪽)
이 책의 저자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했을 것이다. 여성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로 거슬러가서 그 근원을 찾아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했다.
이 책에서는 방대한 양의 책들이 참고문헌으로 사용되었다. 그중에서 몇 개만 살펴보기로 한다.
결혼한 주부들의 ‘가사 노동’에 관한 글에 특히 공감했다. 맞벌이 부부이지만 가사의 절대적인 몫은 대개 여자들에게 주어지는데 그 해결책은 있는 걸까?
브리짓 슐트의 《타임 푸어》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시간 부족이 나만의 문제일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집중력이 뛰어나고 정리를 잘해서 여유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시간을 요령 있게 활용해서 일도 훌륭히 해내고, 부모 역할도 잘하고, 빨래도 말끔히 개고, 풍부한 여가를 통해 행복을 느끼고 있단 말인가? 나는 SNS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가가 있는 엄마를 찾습니다.” 나에게 돌아온 답변들은 대략 이런 식이었다. “그런 엄마를 찾으면 박물관에 보내는 게 좋겠어요. 유니콘, 인어, 그리고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 정치인 옆에 세워둡시다.”
저자는 2015년에 출간된 《타임 푸어》와 2001년에 출간한 혹실드의 책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를 비교했다.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는 1976년부터 1988년까지 맞벌이 부부 50쌍의 생활을 관찰해 기록한 것을 정리한 책인데, 아직 여성의 가사 노동에는 왜 큰 변화가 없는지 답답해했다.
1970년대부터 2019년 현재까지 공적 영역에 진출한 여성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남성이 사적 영역에 진출한 사례는 극히 미약하다. 여성은 가사라는 무임금 노동을 계속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여성만이 이중 노동, 2교대 근무 중이라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40쪽)
저자는 여기에 대한 설명의 하나로 ‘가부장제’를 이야기했다.
가부장제는 아내의 노동을 없는 것처럼 만든다. 그래서 가끔 사사 노동과 유급 노동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맡은 역할과 노동이 과중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것’인 양 취급한다. (44쪽)
또 한편으로는 워킹맘의 남편들은 ‘회사 인간’이어서 현실적으로 집안일을 도울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가사 노동 문제는 개인이 풀기에는 너무나도 겹겹이 또 다른 문제에 둘러싸여 있다. 일상에서 우리는 여성의 일과 남성의 일이라는 고정관념, 누가 더 그 일에 능숙한가 와 관련된 효율성, 그리고 그 시간에 누가 더 생산성이 높은가와 관련된 효과성을 따진다. 거기에 가족 문화와 전통, 성격과 환경의 문제까지 들먹거리면 ‘아이고, 그냥 내가 하는 게 속 편하지 뭐’하고는 또 꾸역꾸역 하게 되는 거다. (47쪽)
정희진이 애너벨 크랩이 쓴 《아내 가뭄》의 추천사에서 했던 이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다. 자기가 먹은 밥그릇은 자기가 치우는 것이다. 자기가 입은 옷은 자기가 빨래하는 것이다. 이를 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사람(개인) 미달’이다. 그러므로 ‘주부’나 ‘아내’는 정체성도, 직업도, 지위도 될 수 없다. ‘아내 가뭄’은 모두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반대로 어느 누구도 ‘아내를 가질’ 특권은 없다는 뜻이다.”
현실에 있어서는 남편이나 아내 둘 다 힘들다. 그렇지만 가사 노동의 적절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내는 수퍼 우먼으로 살아야 한다. 수퍼 우먼의 삶은 고달프고 행복하지 않다.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을 담보로 한 가정의 행복은 ‘가짜 행복’ 일뿐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 제목은 ‘행복에 대한 규율에서 벗어나기’이다.
저자는, 사라 아메드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에서 페미니즘의 역사는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아라’라는 순응과 행복의 의무에 불만을 토로하며 때로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를 벗어난 여성들이 일으킨 ‘소란의 역사’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하면서 ‘행복’이라는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고 했다.
행복이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규범을 전달하고 수행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젠더 차별적인 가부장제 지배 이데올로기와 강제적 이성애가 평범함과 등치 되고, 이 모든 것이 행복의 규율이자 담보가 되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게 된다.(272쪽)
현실이 마냥 밝은 것만은 아니지만, 저자는 희망을 가지고 전진하겠다고 했다. 그 희망의 동반자는 바로 ‘책’이라고 했다.
페미니스트에게도 몇 가지의 생존 키트가 필요하다. 아메드는 그 자리에 몇 권의 책들을 넣어두었다. 나는 그 책들을 읽는다. 내가 읽은 책의 레퍼런스로 내가 지을 집의 형태가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페미니스트를 페미니즘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읽는다면 함께 집을 지을 수 있다. 함께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불행 속에서라도 웃을 수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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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언급하며
저자는 페미니즘을 배워가는 과정이 ‘언어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고 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언어와 생각들이 처음부터 진실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과정 말이다. 그 언어의 레퍼런스를 따라가게 되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집단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는 것, 우리들 개개인은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여러 억압 속에서 여러 정체성을 가지면서 다양한 집단과 중첩되거나 고유한 특징을 같이 가지게 된다는 것. 우리는 서로 다른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고 그 상황이 항상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그 상대성의 차원을 언어로 로직 화하고, 교차 성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가진다는 것. 그 교차 성을 횡단하면서 실천과 연대, 협력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횡단적 대화는 여러 집단적 입장에 수반되는 다층적 시각이 제공하는 혜택을 모두가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점. 이런 것들을 배워나가는 데 ‘흑인 페미니즘’이 풍부한 통찰력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