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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일기/ 김연수 지음/ 레제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이 책의 부제가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이다. 밤은 어둡다. 그래서 여기서의 밤은 어둠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 어둠의 역사는 용산참사와 세월호 침몰, 문화계 블랙리스트, 2016년 촛불들 등의 사건들이다.

역사는 그 궤적을 살펴보면 늘 어둠과 빛의 반복이었다. 어둠이 가장 짙어진 후에야 빛이 들어왔다. 그러니 그 어둠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길더라도 빛을 기다려야 한다. 결국 새날은 밝아올 테니까. 새날을 밝히는 것은 빛이다. 그 빛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열렬한 혁명가의 운동이거나, 어둠에 눈감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응시하는 개인들의 조용한 기록일 수 있다.


작가는 그 어두운 날들을 증언했지만,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각 개개인들이 모두 증언자들이다. 그래서 작가도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어두운 시절의 일기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이 책이 지난 십 년 동안 쓴 글을 묶은 것이라고 했다. 십 년간의 일기인 셈이다.


그는 가끔 어떻게 소설가가 됐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가 소설가가 되기 전에 습작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했다. 그는 그때 습작을 한 게 아니라, 일기를 쓴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얼마 전에 출간된 『카프카의 일기』를 보고서야, 자신의 지난날 습작들이 ‘일기’였다는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일기’가 카프카가 글쓰기를 배운 학교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카프카의 일기』에 나오는 ‘일러두기’를 떠올렸다.


일기를 쓸 때 정말 중요한 요소는 열정, 감각, 진실함, 연민, 호기심, 통찰, 창의성, 자발성, 예술적 기교, 기쁨이다. 맞춤법이나 문법, 단정한 글씨, 어순, 시간 순서, 완성도 따위는 일기 쓰기에서 별로 중요치 않다.(18쪽)


그리고 그는 일기 혹은, 글쓰기는 결국 자기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읽는 사람이 없을 것. 마음대로 쓸 것. 이 두 가지 지침 덕분에 일기 쓰기는 창의적 글쓰기에 가까워진다(...) 글쓰기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일기 쓰기를 권하고 싶다. 누구도 읽지 않을 테니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써라. 대신에 날마다 쓰고, 적어도 이십 분은 계속 써라. 다 쓰고 나면 찢어버려도 좋다. 중요한 건 쓰는 행위 자체이지, 남기는 게 아니니까. 이것이 바로 『일기, 나를 찾아가는 첫걸음』에 나오는 일기 쓰기 지침이다.


이렇게 하면 글을 자주 쓰게 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자주 쓰면 많이 쓸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잘 쓰게 된다. 그런데 일기 쓰기의 이 두 가지 지침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일기의 목적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이 글쓰기 과정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것은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다”는 캐서린 맨스필드의 말처럼, 자기 이해다. (18~19쪽)

의외로, 그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문학의 역할에 대해 우울한 의견을 내놓았다. 문학이 타자의 고통을 충분히 애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영구히 쓰고 읽어야 한다고 했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문학은 충분히 애도할 수 없다. 검은 그림자는 찌꺼기처럼 마음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애도를 속히 완결 지으려는 욕망을 버리고 해석이 불가능해 떨쳐버릴 수 없는 이 모호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게 문학의 일이다. 그러므로 영구히 다시 쓰고 읽어야 한다. 날마다 노동자와 일꾼과 농부처럼, 우리에게 다시 밤이 찾아올 때까지.(49쪽)


그러면서 작가는 ‘글을 쓴다는 것은, 덧없이 부서질 뿐인 모래 만다라를 다시 만드는 일과 같다’고 했다. 삶 또한 그렇지 않을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덧없이 부서지고 부서지는 모래 만다라를 계속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삶이므로.


그러나 그는 문학이 삶을 위로해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피력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 매혹시킨 근대적 기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닮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구불구불 흘러내려가는 강을 닮아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곧잘 지체되며, 때로는 거꾸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지만, 그때가 바로 흐름에 몸을 맡길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쉼 없이 흘러가는 역사에 온전히 몸을 내맡길 때, 우리는 근대 이후의 인간, 동시대인이 됩니다. 그때 저는 온전히 인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역사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때, 우리의 절망은 서로에게 읽힐 수 있습니다. 문학의 위로는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301쪽)


쓴다는 것, 그리고 읽는다는 것. 참으로 사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행위 속에는 얼마나 큰 힘이 숨어있는가. 그것은 삶을 인내하는 것이며, 또 그 인내는 잘못된 삶에 대한 강한 저항이기도 하다. 개인의 그런 인내와 저항은 시간의 역사를 견디며, 어느 순간에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힘이 되기도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 만들어내는 위대함을, 우리는 삶에서 종종 만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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