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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헤르타 밀러/문학동네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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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는 1953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독일계 소수민족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이차대전 당시 나치 무장친위대로 징집되었다가 돌아왔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의 강제수용소에서 오 년간 노역했다. 부농이자 상인이었던 할아버지는 루마니아에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 당시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수용소에 전쟁포로처럼 끌려갔던 마을 사람들은 돌아와서 침묵했다.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몰락과 루마니아 독재정권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뮐러는 늘 정체 모를 공포와 불안감에 시달렸다.


뮐러는 사람들의 침묵 뒤로 삼켜진 말들을 불러내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자세한 말하기를 꺼렸다. 그러던 중 뮐러는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Osjar Pastior)를 알게 되었다. 파스티오르는 열일곱 살에 우크라이나의 수용소로 끌려가 오 년간 강제노동을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레오의 모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뮐러는 파스티오르의 경험담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함께 책을 쓰기로 했다. 그렇지만 2006년 10월 파스티오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뮐러는 혼자서 책을 완성해야만 했다. 이 책은 파스티오르에 대한 오마주로 볼 수 있겠다.





주인공 레오는 열일곱 살 때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는 동성애자였는데 자신을 모르는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은 터였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전혀 예측하지도 못한 채.

떠날 때 그의 할머니는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말을 그에게 했다. 할머니의 말은 그에게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 수용소 생활을 견디게 해 주었고, 그는 수용소 생활에서 살아남아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수용소 생활의 생생한 묘사에는 작가에게 도움을 주었던 시인 파스티오르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수용소의 세계는 정상적인 바깥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곳은 지옥이었으며 어쩌면 이 세상이 아닌 어떤 다른 세계에 속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극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동물적인 본능에 의존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먹어야 했다. 그런데 생존의 절대 조건인 음식은 늘 부족했다. 음식은 음식이 아니었고, 절대 종교였다. 수용소 생활 묘사의 상당 부분은 배고픔에 관한 것이었다. 굶주림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아져야 하는지를 묘사하는 글 앞에서는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누군들 그러하지 않았겠는가.

몹시 가슴 에이는 글이지만, 그곳 생활을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몇 단락만 옮겨본다. 그곳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공감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카를리 할멘의 도둑질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도 우리가 내린 벌을 비난하지 않았다.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빵의 법정은 재판을 하는 게 아니라 처벌만 내릴 뿐이다. 절대 영도(絶對零度)에는 세칙이 없다. 법이 필요 없다. 배고픈 천사가 뇌를 훔치는 도둑이라면 절대 영도는 법 자체다. 빵의 정당성에는 현재만 있을 뿐, 전후 과정이 없다. 완벽하게 투명하거나 완벽하게 비밀에 휩싸여 있다. 빵의 정당성은 배고픔이 뒤따르지 않는 폭력과는 다른 폭력이다. 빵의 법정에는 일반적인 도덕이 들어설 수 없다.(127쪽)


-카를리 할멘이 이웃의 빵을 훔쳤을 때 사람들은 사냥개 떼처럼 그에게 달려들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때렸고, 그는 이가 두 개나 빠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카를리 할멘의 얼굴에다 차례대로 오줌을 누었다. 윗글은 그 사건에 대한 것이다. 배고픔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가슴 아프게 보여주는 글이었다.



배고픔이 극에 달하면 우리는 어린 시절과 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자들의 음식 이야기는 남자들에 비해 상세하다. 그중에서도 시골 여자들의 음식 이야기가 가장 상세하다. 각각의 조리법에 대해 그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연극처럼 적어도 3막까지는 이어진다. 재료 선택 과정에서부터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기 때문에 긴장감이 감돈다. 거기에 돼지비계와 빵과 계란을 넣어라, 양파는 반만 넣으면 절대 안 되고 하나를 통째로 넣어야 한다, 마늘은 네 쪽이 아니라 여섯 쪽을 넣고, 양파와 파는 다지지 말고 꼭 갈아야 한다는 설명이 뒤따르면 순식간에 이야기의 흥이 오른다.(129쪽)


-배고픔이 극에 달할 때, 수용소 오기 전에 요리하고 먹었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배고픔은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과 환상의 세계를 꿈꾸게 했다. 극도의 굶주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슬픈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이건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



빵의 덫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침식사 때는 꿋꿋함의 덫에, 저녁 식사 때는 빵 바꾸기의 덫에, 밤에는 머리맡에 묻어둔 빵의 덫에. 배고픈 천사가 놓은 가장 고약한 덫은 꿋꿋함이다. 배도 고프고 빵도 있지만 먹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단단히 얼어붙은 땅보다 혹독 해지는 것이다. 배고픈 천사는 아침마다 말한다. 저녁을 생각해.
저녁에 양배추 수프 앞에서 빵을 바꾼다. 내 빵이 다른 사람의 빵보다 항상 작아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빵을 바꾸기 직전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허둥대는 순간이 온다. 그러고 나면 곧바로 의구심이 고개를 쳐든다. 빵이 내 손을 떠나자마자 남의 손에 있는 빵이 더 커 보인다. 내가 받은 빵은 내 손에서 줄어든다. (134쪽)


-수용소 생활의 비극적이고 슬픈 이야기이다.


죽은 사람을 보면 팔다리가 굳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기 전에 서둘러 옷을 벗겨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가 아껴둔 빵을 베개에서 꺼내야 한다. 그렇게 말끔히 정리하는 것이 우리가 애도하는 방식이다. 막사에 들것이 도착하면 수용소 간부들이 시체만 가져갈 수 있게 다른 것은 없어야 한다.
죽은 사람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전리품만 보인다. 시체를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악의적인 행동이 아니다. 입장이 바뀐다면 죽은 사람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수용소는 실용적인 세계다. 수치심과 두려움은 사치다. 흔들림 없이, 어설픈 만족감으로 시체를 처리한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과는 다르다. 죽은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줄어들수록 삶에 더 악착같이 매달리게 되는 듯하다. 그만큼 착각은 더 심해진다.(168쪽)


-삶의 집착일까? 아니면 그냥 본능적인 행동일까? 끔찍하게 보이는 장면이지만, 극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누구인들 저렇게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인간성을 철저히 유린하는 수용소를 만든 것, 또한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상황에 따라서 천사도, 악마도 될 수 있는 것 같다.

인간답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의식주가 ‘필요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이 그냥 인간답게 우아하게 행동하기는 힘든 것 같다. 생존이 그 모든 것보다 앞서는 것이라는 것. 이 사실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에 대해 한없는 슬픔을 느끼기도 했다.



배고픔의 단어는 모두 먹는 단어다. 눈앞에 음식이 그려지고 입천장에 맛이 느껴진다. 배고픔의 단어들 혹은 먹는 단어들은 환상을 먹여 키운다. 말이 말을 먹으며 맛있어한다. 배는 부르지 않지만 적어도 음식 곁에 머문다. 만성적으로 굶는 사람들은 저마다 선호하는 단어가 있다. 드물게 쓰는 단어와 지속적으로 쓰는 단어가 있다. 각자 제일 맛있어하는 단어가 따로 있다. 카푸스타처럼 명아주 역시 먹는 단어에 들지 못한다. 먹는 단어는 실제로 먹는 것 혹은 먹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배고픈 상태에서 맹목과 주시는 같은 말이다. 맹목적 배고픔은 음식을 가장 잘 본다. 은밀한 배고픔과 공공연한 배고픔이 있듯, 소리가 없는 배고픔의 단어들과 소리가 큰 배고픔의 단어들이 있다. 배고픔의 단어들, 즉 먹는 단어들이 대화를 지배할 때도 우리는 혼자다. 저마다 자기 단어들을 먹는다. 함께 먹는 다른 사람들도 결국은 자기를 위해 먹는 것이다. 배고픔에서 타인이 차지하는 자리는 없다. 타인의 배고픔을 나눌 수는 없다(...) 배고픔은 여름내 자라는 풀보다, 겨우내 쌓이는 눈보다 빨리 자랐다. 평생 자랄 것이 하루 만에 자란다고나 할까. 내게는 배고픈 천사가 덩치만 불리는 게 아니라 수를 늘려 번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모두 똑같은 처지였는데도 배고픈 천사는 저마다 개인적인 고통을 안겼다. 뼈와 가죽, 배설되지 못한 수분이 삼위일체가 되어 여자와 남자의 차이가 사라졌고 성(性)은 퇴화했다. 그 혹은 그녀라는 말은 썼지만 저 빗이라든가 그 막사라고 할 때의 지시어와 다를 바 없었다. (178~179쪽)


-배고픔이 인간을 어떻게 ‘사물화’하는지를 절절하게 보여주는 글이었다. 배고픔에는 인격과 성(性)이 없었다.



수용소에 있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이, 레오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신념으로 그곳 생활을 견뎌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수용소 생활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곳 생활을 묻지도 않았다.

고향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정상적인’ 생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레오에게는 고향의 평화로운 모습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수용소에서 오 년 동안 겪은 일을 도저히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었다. 과거 오 년 동안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가족들에게조차도 그의 과거를 결코 말할 수가 없었다. 되찾은 자존감은 현재의 레오를 괴롭혔다. 그는 과거의 레오를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는 오히려 정상적인 현재 상황에 적응을 하지 못했고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힘들었다. 그가 수용소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이 출생했다. 그는 부모님이 자기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자기 대신에 새로 자식을 두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몹시 서운해했다. 그리고 가족들이 자기가 살아 돌아온 것을 오히려 당혹스럽게 느낀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미안함이나 두려움 때문에 감히 레오에게 그곳 생활에 대해 묻지 못했던 것 같다. 레오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몹시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레오에게 그 고통을 다시 말하게 하는 것이 또한 두려웠을 것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가족들의 ‘일종의 배려’라고도 볼 수 있다.

가족들은 레오에게 다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고, 레오는 그것을 가족의 무관심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레오와 가족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경계가 생겼고, 그 경계는 레오를 더욱 외롭게 했다. 그는 수용소 생활을 그리워하기까지 했다.


내게는 레오가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의 이야기 또한 충격적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과 달리, 레오가 맞이한 것은 즐거움이 아닌, 당혹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감정은, 수용소 생활을 한 사람들과 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생긴,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 때문에, 서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현실로 인한 것이었다.


이 작품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인간의 탐욕이 일으킨 전쟁 탓이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전쟁만을 비판한 글은 아니었다.

『숨그네』는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저지른 끔찍한 행동을 되돌아보게 했다.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리를 주었던 것일까.

더 나아가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들의 행동을 통해,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하게 했던 작품이었다.


*‘숨그네’는 헤르타 뮐러가 만든 조어(造語)다. 숨을 쉬는 매 순간 삶과 죽음을 ‘그네’처럼 왔다 가는 수용소 생활을 묘사한 단어이다.



KakaoTalk_20200616_123418895.jpg <헤르타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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