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메리 올리버는 소설가 김연수가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기러기」라는 시를 인용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그녀는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 등을 받았고, 뉴욕 타임스는 미국 최고의 시인이라 칭했다. 2009년 9.11 테러 희생자 추모식에서 부통령 조 바이든이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를 낭독했다.
기러기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 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김연수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문학동네, 2007)에 인용된 번역
그녀는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월트 휘트먼을 계승했다고 하니, 미국에서의 그녀 시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녀의 시를 곁들인 산문집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책은 『완벽한 날들』인데, 그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고 이 책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 책 표지 뒷면에 있는 소설가 김숨의 추천사가 인상적이었다.
메리 올리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걸 느낀다.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밥을 먹고, 길을 걸어가고, 지하철에 오르던 무력 무감한 내게. 영혼 없이 어제와 오늘을 떠돌던 내게.
이 추천사를 읽으며, 책을 읽기도 전에 몹시 설렘을 느꼈다.
<기러기>를 비롯한 그녀의 시들은 자연을 노래한 것들이 많았다. 『휘파람 부는 사람』에는 산문과 시가 함께 실려 있는데, 이 책에서도 자연을 벗 삼아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그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오십 세가 넘어서 만난 몰리 멀론 쿡 이야기도 했다. 이 책 제목인 ‘휘파람 부는 사람’이 바로 몰리였다.
어느 날 메리 올리버는 집에서 휘파람 소리를 들었는데, 그 휘파람은 몰리가 분 것이었다.
휘파람 부는 사람
갑자기 그녀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어. 내가 갑자기라고 말하는 건 그녀가 30년 넘게 휘파람을 불지 않았기 때문이지. 짜릿한 일이었어. 난 처음엔, 집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나 했어. 난 위층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그녀는 아래층에 있었지. 잡힌 게 아니라 스스로 날아든 새, 야생의 생기 넘치는 그 새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지저귀고 미끄러지고 돌아오고 희롱하고 솟구치는 소리였어.
이윽고 내가 말했어. 당신이야? 당신이 휘파람 부는 거야? 응, 그녀가 대답했어. 나 아주 옛날에는 휘파람을 불었지. 지금 보니 아직 불 수 있었어. 그녀는 휘파람의 리듬에 맞추어 집 안을 돌아다녔어.
나는 그녀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했어. 팔꿈치며 발목이며, 기분이며 욕망이며, 고통이며 장난기며, 분노까지도. 헌신까지도.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기 시작하긴 한 걸까? 내가 30년간 함께 살아온 이 사람은 누굴까?
이 맑고 알 수 없고 사랑스러운, 휘파람 부는 사람은?
그녀는 30년간 함께 살아온 몰리가 휘파람을 부는 것을 처음 듣고서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그리고 자신이 과연 그녀를 제대로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 물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얼마나 몰리를 좋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시들이 좋았지만, 이 책에 실린 산문들도 무척 좋았다. 산문에서는 시를 쓰는 마음의 자세를 밝힌 글들이 많아서, 그녀의 세계관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 해 전에 나는 스스로 세 가지 ‘규칙’을 정했다. 내가 쓰는 모든 시는 진짜 몸과 진정한 힘, 정신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시든 이 세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하면 퇴짜를 놓고 다시 쓰거나 과감히 버렸다(...) 나는 내 모든 시가 강렬함 속에서 ‘쉬기를 ’ 원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습들’로 풍부해지기를 원한다. 지각으로 느낀 세계가 지적인 세계로 이어지기를 원한다. 지성, 인내, 열정, 기발함으로 산 삶(반드시 내 삶이어야 하는 건 아니고 공식적인 나, 작가로서의 삶)을 나타내기를 원한다.
나는 내 시가 무언가를 묻기를, 그리고 그 시의 절정에서 그 질문이 응답되지 않은 상태로 남기를 원한다. 질문에 답하는 건 독자의 몫임이 작가와 독자 간의 약속에 명시되어 있음을 분명히 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내 시가 고동침을, 숨 차오름을, 세속적인 기쁨의 순간을 담기를 원한다. (독자를 심각한 주제의 영역으로 유혹할 때에도 즐거움은 결코 하찮은 요소가 아니다.)(45쪽)
독자가 자신을 참여자로 느끼지 못하는 시는 건물 속 갑갑한 방에서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 듣는 강의다. 내 시들은 모두 야외에서, 들판, 해변, 하늘 아래서 쓰였다. 마무리까지 되진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시작은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내 시들은 강의가 아니다. 중요한 건 시인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47쪽)
나는 시를 쓸 때 복종적이고 순종적이다. 할 수 있는 한 자존심과 허영심, 심지어 의도까지 내려놓는다. 그리고 귀 기울인다. 내가 듣는 건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언어에 가깝다. 자기 자신이기보다는 나뉠 수 없는 한 공동체의 일부일 때 귓가로 밀려들어 귀에 대고 노래를 부르거나 귓속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또 하나의 바다다. 블레이크는 받아 적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블레이크가 아니지만 그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안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그걸 안다. 어떤 이는 기교를 배운 뒤 과감히 버린다. 받아 적는 재능을 갖고 싶은 것이다. 그건 물리적인 동시에 영적이다. 친밀하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나는 초고를 쓸 때 종이와 연필만 고집하는지도 모른다. 이 느리고 심오한 듣기에 타자기나 컴퓨터는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143~144쪽)
산문에서 그녀는 시를 쓸 때의 마음자세를 아주 자세히 말했다. 그녀는 자연 속에 살았으며, 자연의 소리를 들었고, 스스로 자연의 일부임을 시에서 노래했다.
나는 바람, 떡갈나무, 떡갈나무 잎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대신해 이야기할 것이다. 올빼미, 지렁이 도마뱀, 수선화, 붉은점도롱뇽에 대해 육체뿐 아니라 정신의 동지로 이야기할 것이다. 눈밭으로 나온 여우가 나만큼 예민한 신경과 나보다 뛰어난 용기를 지녔다고 이야기할 것이다.(148쪽)
요즘 현대시들은 갈수록 난해 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시인과 독자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 그렇지만 메리 올리버의 시들은 그녀가 밝힌 것처럼 어려운 ‘강의’가 아니었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시들은 독자들이 스스로 참여하게 했다.
그녀의 시를 읽다 보면, 마치 그녀와 나란히 앉거나 서서, 그녀가 노래한 바로 그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그녀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메리 올리버의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마음과 폭설의 현장이 생생하게 드러난 즐거운 시 한 편을 옮겨본다.
폭설
지금 새하얀 과수원에서 나의 작은 개가
뛰놀고 있어, 거친 네 발로
새로 쌓인 눈을 파헤치며.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고, 잔뜩 신이 나서
멈출 수가 없어, 껑충거리고 빙글빙글 돌며
흰 눈밭에 크고 생기 넘치는 글씨로
육신의 기쁨을 표현하는
긴 문장을 쓰고 있어.
오, 나라도
그보다 잘 표현할 순 없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