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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샤를 페팽 지음/니케북스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샤를 페팽은 프랑스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철학자이자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 『기쁨』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리메이크한 작품, 즉 『이방인』에 대한 이마주 작품이다. 그런 만큼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은 『이방인』과 흡사하지만, 샤를 페팽 특유의 스타일로 경쾌하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두 작품을 함께 읽고 비교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간밤에 충분히 자지 못했으나, 행복한 기운이 근육 속을 흐르고 피에 온기가 돌며 내내 내 안에 머물렀다. 도시를 가르는 햇빛, 9월의 태양은 늘어선 자동차 엔진과 보닛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나는 한 팔을 창문 밖으로 늘어뜨린 채, 한 손으로 운전했다. 손바닥 아래 데일 듯이 뜨거운 차문과 팔 안쪽을 어루만지는 듯한 함석판의 감촉에 꽤나 기분이 좋았다. (7쪽)



소설은 이렇게 시작되는데, 제목이 나타내는 듯한 어떤 ‘기쁨’이 느껴진다. 주인공 솔라로는 어머니가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지금 그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어머니의 건강도 좋지 않고 그의 사업도 힘들지만, 솔라로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보다는 현재 이 순간의 느낌에 충실하고 존재 자체의 ‘기쁨’에 집중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작품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주인공이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우연히 조직 폭력배 두목을 죽이게 된다. 2부에서는 솔라로의 재판 과정을 다루고, 3부는 솔라로의 감옥 생활과 죽음을 다룬다.


햇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묘지 여기저기 꽃이 만발해 있었다. 무덤들은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고, 선명한 색깔의 꽃들이 가득 핀 자유 사유지들 위에 정오의 태양이 내리쬐면서 꽃들이 희뿌옇게 보이는 광경이 그야말로 눈부셨다. 그처럼 아름답고 관능적이기까지 한 묘지를 나는 본 적이 없었다.(58쪽)


이 풍경은 솔라로가 살인을 하기 전에 있었던 어머니의 장례식 풍경이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현재 펼쳐지는 아름다운 광경에 마음을 살짝 뺏기고 있는 듯했다.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방인』에서도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작품에서의 분위기는 강렬한 햇살 때문에 장례식 분위기는 오히려 어둡고 살벌하게 보였다. 그렇지만 솔라로 어머니의 장례식의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똑같이 햇살이 있는 풍경이지만, 주인공이 마치 피크닉이라도 나온 것처럼 매우 밝고 경쾌하게 묘사되어 있다.


솔라로가 우연히 살인을 하고 난 다음에 그에 대한 재판이 펼쳐지는 장면을 보면, 카뮈의 『이방인』에서 재판관들이 살인 그 자체보다 살인하기 전의 뫼르소의 태도를 더 문제 삼으면서 판결을 내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솔라로 역시 뫼르소처럼 자신이 저지른 죄, 즉 살인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기대하는 태도, 즉 반성이라든가 참회 따위의 감정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고,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선처를 구하지도 않았다.


나는 후회하고 있었을까? 물론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사태가 다른 식으로 흘러갔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 내 관심 밖이었다. 후회한들 뭐가 바뀐단 말인가?(121쪽)


솔라로는 과거에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미래에 대해서도 근심하지 않지만,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하는 존재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반성을 하거나 후회를 하지 않는 솔라로를 보면서 재판관들은 경악한다. 그리고 그들은 솔라로가 살인하기 전에 했던 행동들, 즉 병원에 입원해 있던 엄마를 만나러 왔을 때 솔라로의 걸음걸이가 나는 것처럼 가볍고 경쾌했다고 기억한 주치의의 증언과, 그의 엄마 장례식에서의 그의 태도와 모습 등이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엄마 장례식 직전에 그는 폭력배들에게 맞아서 얼굴에 멍든 상태로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를 좋지 않게 본 것이었다.


내 차례가 돌아오자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내 눈가에 든 멍과 눈두덩의 상처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잘못된 뭔가를 말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내게 이야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가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나 혼자 엄마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63쪽)


재판 과정에서 배석 판사 중 하나가 살인이 일어나기 전, 솔라로에게 어머니의 장례식에 대해 말해 달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복잡한 일이 아니었으며 그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신경을 썼다, 장례식에 틀 음악을 고르고 어머니의 지인들과 친구들과 가족의 추도사 순서를 정하는 일을 기꺼이 했다. 장례식 당일에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가도록 노력했다.


그의 대답에 판사는 질문의 맥락을 다시 짚었다.


“그래서 모든 게 잘 돌아갔다, 모든 게 잘 돌아갔다고 방금 말한 겁니까?”


솔라로는 다시 대답했다.


실제로 모든 게 잘 돌아갔고, 햇살이 화창한 맑은 날에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정말 멋져서 행복했으며, 그들의 추도사가 엄마에게 변함없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어 행복했다.


이에 판사는 다시 발언했다.


“피고인은 모든 게 잘 돌아가서 행복했다고, 햇빛과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했다고 했는데, 당신의 말을 바로잡자면 추도사가 당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배신하지 않는 내용임을 확인해서 만족스러웠다, 이래야 맞지 않습니까?”



판사들은 솔라로가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단정하며, 솔라로를 이미 살인을 할 가능성을 갖고 있던 ‘위험인물’로 몰고 갔다.

솔라로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서 일반인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참회나 반성의 감정을 거의 보여주지 않아서 오히려 재판관들의 분노를 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판결에 불리하게 작용했지만 그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 솔라로가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아이’라고 증언했지만, 재판관들을 전혀 설득하지 못했다. 재판관들은 이미 자기들이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솔라로 아버지의 이야기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조차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검사는 방청객과 배심원에게 솔라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다는 듯 모든 걸 받아들이고 수긍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우울증, 어머니의 죽음, 법적 소송뿐 아니라 경제적 곤경, 그리고 젊은 남자의 죽음까지도(...) 여러분의 인간애에 두고 호소합니다. 무슨 말을 들으셨습니까? 가슴에서 우러나온 후회의 말을 들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그가 살인범이라 해도, 설령 그가 태연하게 살인을 저질렀을지라도, 그가 살인하기를 원해서 살인을 저질렀을지라도, 우리는 이 사람의 형량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이런 이치에 맞는 말을 들으셨습니까? 저는 못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대신 다른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솔라로가 얼마나 냉혈한인지를 참석한 사람들에게 설득했고, 솔라로에게 13년 형을 선고했다. 우발적인 사건에 비해서 형량이 과했다고 할 수 있다. 재판 과정에서는 솔라로의 범죄 행위 자체보다 그 이전에 있었던 일들과 사후의 솔라로의 태도를 더 문제 삼았다. 솔라로의 태도는 기존 사회의 관습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었고, 이런 태도는 폭력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3부에서의 첫 장면을 보면 솔라로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발아래 땅의 부드러운 촉감이 나는 좋다. 두 손으로 쥔 흙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때의 느낌도 좋다. 그것은 비,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비 같다. 법정의 소란을 잠재운 침묵의 기적이 좋다. 그리고 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가며 항ㄴ색 자취를 남길 때 정말 더 바랄 게 없어진다. 아, 물론 나도 안다. 무수한 철조망이 쳐져 있고 감시탑들도 많지만 거기에는 익숙해졌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둘둘 말린 형태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철조망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사랑을 나누는 인간의 육체처럼 보이기도 했다가 화가의 크로키나 또 다른 뭔가가 되기도 한다.(159쪽)


솔라로는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의 햇빛과 물뱀과 귀뚜라미와 포근한 바람을 사랑했다. 그는 현재의 기쁨을 놓치지 않았다.


전에는 매출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치만 생각했고 결과에 매몰되어 늘 긴장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리듬이다. 리듬과 유연성.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다. 스윙댄스를 추듯 수월하게 지나가길 원한다. 전에는 내 몸을 유지하기 위해 팔 굽혀 펴기를 했지만 이제는 즐거움을 위해 한다.
예전에 나는 근면한 일꾼이었지만 이제는 춤을 추는 사람이다. 녹초가 될 정도로 팔 굽혀 펴기를 한다. 리듬을 타고 그걸 느끼며 리듬 안에 있다. 춤추고, 춤추라. 팔에 힘을 가하고 손바닥에서 우지끈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쓰면서 내가 되뇌는 말은 이것이다. 춤추고, 춤추라.(168쪽)


감옥에서 솔라로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일반인의 상상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그는 오로지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하고 존재 자체의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기존의 제도권에서 볼 때 그를 바라보면, 그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인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가 면회 왔을 때, 솔라로가 아버지에게 한 말과 그가 한 생각은 나름대로 정당성이 있어 보인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그밖에 다른 것은 없다고 이야기했다(...)그리고 나는 석방에 대해 결코 생각해본 적이 없노라고 했다. 한 번도. 나는 이곳에 사랑해야 할 삶이 있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했다. 아버지가 희망을 갖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희망이란 독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 있는 자신을 사랑할 힘을 빼앗아가는 독이기 때문에.(173~174쪽)



그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그 상황을 다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은 ‘지금 여기 있는 자신을 사랑할 힘을 빼앗아가는 독이기 때문에’ 희망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그는 어떤 면에서는,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현대인들보다, 오히려 더 지혜로운 것 같다. 다만 그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너무 열중해있기 때문에 타인과의 사회적인 관계에는 매우 서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변호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솔라로는 교도소에서 일주일에 한 번 심리상담가와 상담할 때 그는 잘 지낸다고 했다. 그러면 상담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결국 솔라로는 센터(교도소 안의 정신 병동)로 이송됐다. 그는 이유를 몰랐지만 상황이 더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장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병명에 대해 물었다. 원장은 그에게 명확하게 대답을 해주지 않고 솔라로가 치료를 위해서 왔으며 교도소보다 지내기가 편할 거라는 말만 했다.


내가 고민도 없고 증오도 안 느껴진다고 하자 그는 낙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지친 목소리로 그럼 내가 왜 정원 안쪽에 혼자 서서 소리를 질렀느냐고 묻는다. 그곳이 뜻밖에도 너무나 아름다워서 행복감에 그랬을 뿐인데. 하루 사이에 꽃들이 피었다가 다시 오므라들었다. 그중 어떤 꽃은 오므라든 후에 또다시 피기도 했는데 그건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다. 햇빛이 정원을 가로지르는 가운데 꽃들이 만발해 있다. 의사는 난처한 표정이다.(191쪽)


센터에서의 솔라로의 생활 모습이다. 솔라로는 오직 현재에만 관심이 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의사에게는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과연 어디에서 가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장면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지나간 과거나, 혹은 오지 않은 미래에 늘 정신이 팔려 있을 뿐, 지금 현재 이 순간에는 오히려 집중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떤 면에서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보통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솔라로는 기피 인물로 배척당한다.

결국 기존의 관습에 따라서, 과거에 대해 후회를 하고 미래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보통은 ‘정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런 점을 신랄하게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철학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쁨』은 스토리의 즐거움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고정관념을 전복시키는 즐거운 경험을 하게 해 준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에 대해서, 누가 그것을 정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정해진 것의 정당성은 누가 판단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솔라로를 ‘혜성’이라 불러주던 의사가 있었다. 솔라로는 그 의사를 좋아했지만, 어느 날 의사가 바뀌었다. 새로 온 그 의사는 솔라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의사는 솔라로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기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게 떠오른 단어는 그것이다.


의사는 솔라로의 대답에 ‘이유가 없지 않으냐’고 했다.


나는 의사와 나를 둘러싼 주위를 둘러본다. 창밖의 나뭇가지들, 푸른 하늘, 떠다니는 흰 구름들을. 나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육체를 떠올리고, 내가 발로 딛고 있는 땅을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이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느냐고 그에게 묻는다. 그렇게 입을 다문 채 미동도 없는 그의 회색 눈을 바라보고, 그렇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집스러운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내 안에서 뭔가가 깨어진다. (199~200쪽)


솔라로는 그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의사를 잡고 흔들었다. 의사의 머리가 여기저기 부딪치면서 피가 났고 솔라로는 의사를 밀쳤다. 의사는 쓰러졌고 경비원들이 달려왔다. 그는 유리를 깨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정원으로 달려갔지만 총을 맞았다.


솔라로의 죽음은, 그가 세상과 소통을 할 수 없었고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솔라로 역시,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페르소나’가 없는 인물이었고, 기존 제도의 문법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존재였다.

사회의 관습과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위험인물로 취급된다. 그 사회가 지향하는 것이 제대로 된 가치가 있든 없든 간에 말이다. 사회 시스템이라는 것이 한번 작동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 시스템의 한 부분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시스템이 붕괴되기 때문이다. 솔라로 같은 인간은 체제를 위협하기 때문에 위험인물로 취급되고, 위험인물은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제거될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삶보다는 전체의 일부로서의 개인이 안전하기 때문에, 최대한 제도권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방인』의 뫼르소와 『기쁨』의 솔라로는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렇지만 이런 인물들을 통해 독자들은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늘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에 비로소 의문을 느끼며, 인간 본연의 삶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철학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고민이야말로 문학작품들이 독자에게 주는 큰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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