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우리나라 작가 정이현과 알랭 드 보통이 <사랑의 기초>라는, 같은 제목으로 각각의 책을 썼다. 흥미로운 시도다. 먼저 보통의 책을 집었다.
그의 '사랑'에 대한 분석은 신랄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읽는 도중,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일까?
결혼 생활 30년이 훨씬 더 되었지만, 나는 할 말이 지나치게 많거나, 할 말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것...
부르주아의 이상이 결코 허황된 꿈은 아니다. 로맨스와 에로스, 그리고 가족이라는 세 가지 황금 요소를 완벽하게 융화시킨 궁극의 결혼도 당연히 있다. 종종 냉소주의자들은 행복한 결혼은 신화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렇게 섣불리 치부하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긴 해도, 궁극의 결혼은 분명 존재한다. 결혼이 우리의 소망에 부응하지 말아야 할 형이상학적 이유 같은 건 없다. 다만 상황이 우리에게 몹시 불리할 뿐이다. (34쪽)
보통은, 상황이 몹시 불리하다는 표현으로, 잠시 우리를 희망에 머무르게 하고 싶은 것일까? 일단 그의 말에 동의한다.
사회적 관계의 모순 중 하나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결국은 훨씬 더 잘해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말만 많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 직장 동료들은 하루 종일 성심성의껏 대하다가, 저녁에 집에 와선 잔소리를 평소보다 조금 심하게 했다거나 열쇠 꾸러미 챙기는 걸 깜빡했다는 이유로 솜씨 좋고 상냥한 아내를 매몰차게 면박 주는 남자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마도 그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매우 진지한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고, 어쩌면 이런 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작정하고 싸우려면 먼저 그에게 아주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상대에게 욕을 하고 그 사람의 물건을 창밖으로 던져버릴 마음을 먹으려면 먼저 깊고 유별한, 진정한 애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42~43쪽)
이런 모순적 관계는 우리가 일상에서 늘 경험하는 일이다. 사랑과 미움은 한 끗 차이라는 것. 함부로 사랑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늘 너무 늦게 온다는 것이,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인 듯하다.
낭만적 사랑을 이상화한 부르주아는 이렇게 말한다.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망치고 싶지 않다면 사랑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면 안 된다. (60쪽)
이 의견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 있겠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나 만 은.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가 자본주의로 알고 있는 것은 부르주아가 발명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강력한 옹호와 지지 덕분에 발전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낭만적 사랑도 부르주아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관습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낭만적 사랑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성공하고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생산하는가를 기준으로 존재를 가차 없이 심판하는 시스템 속에서, 더구나 이처럼 종교를 저버린 시대에 우리의 정신이 버텨낼 수 있으려면 비물질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춘 다른 평가방식이 절실해진다. 그 보루마저 없다면 심판의 위력이 너무나 막강해서 우리의 내면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유감스럽게도 사랑에 대한 우리의 낭만적 이상주의에는 사악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낭만적 이상주의는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방어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가치가 경제적 능력에 따라 준엄하게 평가되는 시스템으로부터 해방될 가능성 또한 차단해버린다. 낭만적 이상주의는 부와 사랑이 보다 골고루 아낌없이 분배되는 대안적 방식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만일 경제 시스템을 바꾼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필사적으로 짝을 찾아 헤매고 두려움에 떨며 서로에게 매달릴 필요를 훨씬 적게 느낄 것이다. (65~66쪽)
사랑에 대한 낭만적 이상주의의 기원을, 자본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사랑조차도 사회제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우리는 진짜 누구인가?
이 글에서, 나는 '사랑'보다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권리긴 하지만, 인류 대다수에게, 특히 우리가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라면 가급적 그런 끔찍한 특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는 충고가 늘 따라붙는다.(71쪽)
이건 무슨 소리인가? 있는 그대로를 다 보여주었을 때,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는 힘들다는 소리다. 인간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 다름을 이해하긴 해야 하지만, 사랑하거나 사랑받기 위해서는 약간의 감춤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상대방이 혐오할 가능성 있는 어떤 면이 있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결혼 후이긴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우리가 속하게 된 이 위계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위계는 그들이 우리보다 삼십오 년 먼저 세상에 태어났고, 어쩌다 우리의 존재를 발아시킬 생물학적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우연에서 비롯되었을 뿐, 그들의 고결함이나 지혜 덕분이 아니다. 같은 세대라면 당장 인연을 끊어버릴 사람들, 우리의 내면에 지워지지 않을 표식을 남긴 인물들. 아무리 그들을 증오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애써도 결국 우리는 부모의 실수와 실패를 통해 우리 자신을 규정할 수밖에 없다. (86쪽)
부모에 대해서 이렇게 신랄하게 말할 수 있다니! 우리는 예로부터 부모는 절대적으로 존경을 해야 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국가적으로도 ‘효’는 신성한 의무였다. 그렇지만 부모들이 한 인간으로서 진정 존경받을만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효’는 자식에게 강요된 나쁜 의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부모의 지위를 획득한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효’를 너무 당연하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을 보면 눈에 굉장히 거슬렸다. 자식이 무슨 보험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대등한 인간관계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관계에서 비로소 존경과 이해, 연민의 감정이 싹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의 작품에서는 기혼부부의 결혼 생활의 여러 면을 다루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꽤 문제가 되는 시가나 처가와의 갈등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다. 서구사회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부모나 처가와의 갈등은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를 둘러싼 현대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험천만한 기대를 주입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 때문에 실망하지도 않고, 우리 또한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초자연적인 묘기는 경우에 따라서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더라도 최근까지 우리의 문화 전반을 휩쓸고 대중음악, 영화, 패션, 문학에 영향을 끼친 낭만주의를 마냥 탓하기만 해선 안 될 것 같다. 치명적 오류는 이미 개인의 심리 기저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다수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그리하여 우리가 ‘적절한’ 후보만 찾아낸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역시 그럴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게 되었다. (133쪽)
보통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은밀한 희망을 ‘초자연적인 묘기’라고 부르며,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그런 희망 때문에, 현실에서는 수많은 연인들과 부부들이 상대방에게 절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약하자면,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이 침해당하거나 훼손되지 않은 채 다른 모든 요소들과 공존하는 상태, 아무것도 잃지 않으면서 결혼생활의 갈등이 해결되는 상태를 원한다면, 답은 없다. (138쪽)
결혼생활에서도 손익 분기점이 있는 것 같다. 내줄 건 내주고, 받을 건 받아야 하는. 사실 결혼생활만 그러하겠는가. 우리 삶의 모든 면이 그런 것이겠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너무 자주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맹세합니다. 당신에게, 오직 당신에게만 실망할 것을 맹세합니다. 내 후회의 유일한 대상이 ‘당신’ 일 것을 맹세합니다. 당신만 아니었더라면 평생 수없이 바람을 피웠을 거라는 후회의 본보기일 것을 맹세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불행들을 탐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한 몸 바쳐 희생하기로 선택한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결혼식에서 신혼부부가 서로에게 하는 서약은 이처럼 관대하고 공손하며 낭만적이지 않은 서약이어야 마땅하다. (141쪽)
보통의 어법이 아주 신랄했고 눈물이 날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의 말에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직면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보통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맹세하고 나서 저지르는 외도는 희망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에게만 실망하겠다는 우리의 맹세에 대한 배신이다. 기만당한 배우자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만으로도 그/그녀가 만족할 줄 알았다며 길길이 날뛰고 하소연하진 않을 것이다. 대신 좀 더 통렬하고 적법한 논리에 따라 이렇게 울부짖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선사하는 독특하고 다양한 실망을 당신이 충직하게 감내하리라고 나는 믿었다.”(...)
만일 우리가 인생의 중대한 계획들을 이끌어줄 북극성의 역할을 감정에 맡긴다면, 이는 감정에 너무 큰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다. 인간은 복잡한 화학적 유기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결정을 내린다는 기본 원칙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이 자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분별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146~147쪽)
감정에 너무 연연하지 않으며 하루하루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로서의 결혼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은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감정보다는 이성에 지배받아야 덜 흔들릴 것은 분명하다. 이런 결단의 의지를 가지고 결혼에 임했어야 했구나...
마지막 장, 작가 대담 ‘정이현 & 알랭 드 보통 사랑을 말하다’에서 보통은, 자기가 결혼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결혼의 곤란한 점은,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도 느낄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것들 투성이라는 겁니다. 결혼한 사람들만이 맛볼 수 있는 기쁘거나 행복한 순간도 가끔은 있지만, 많은 시간 그것은 짐작보다 훨씬 더 씁쓸하고 고달프고 무미건조하고 짐스럽습니다. 결혼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기쁨을 찾아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죠. 저는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부부들을 위한 책, 동지적 연대감을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189쪽)
결혼한 사람으로서 동지적 연대감을 느끼게 하는 글이었다. 결혼도 인생의 한 부분이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 찬 결혼 생활 속에서 기쁨을 찾아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다.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절대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각자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그저 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