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유고집이라는 말은 참 쓸쓸하고 슬프다. 그래서 책을 잡기가 겁이 났다. 평소 허수경의 시집을 별로 읽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글은 너무나 아파서, 읽는 사람의 심장에도 생채기를 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유고집은 내 손에 들어왔고,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멀거니 바라보며 전송해야 했다.
이 책은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시작 메모(2011-2018), 2부는 시(2016-2018), 3부는 작품론(2011)과 시론(2016)으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시작 메모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2부에는 시가 13편 실려 있다. 그리고 3부에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에 부쳐’라는 작품론 한 편과, <시인이라는 고아>라고 이름 붙인 시론 한 편이 실려 있다.
작가의 시작 메모를 보면서 그녀의 내적 풍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메모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주로 자기부정, 고독, 고립, 쓸쓸함 등이 많았다. 그런 슬픔의 언어들이 작가의 심장 속에서 자리 잡고 있었고 무성하게 가지를 뻗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 언어들이 결국은 작가를 많이 상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물론 그런 단어들은 많은 시인들의 글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것들이지만, 특히 허수경 시인에게 더 슬픈 이미지로 나타난 것 같았다. 시작 메모를 보면, 그녀는 오로지 ‘시’만을 위해 산 ‘철저한 시인’ 같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시를 썼지만, 언제나 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시작 메모인 만큼 시에 대해 언급한 글들이 많았고, 그 글들을 두고두고 읽고 싶어서 옮겨본다.
-혼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며 말을 주고받는 행위 역시 대화에 속한다. 모국어로 말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늘어나면 날수록 나는 내 속에 수많은 타인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의 많은 좋은 시는 완벽한 모놀로그를 다이알로그로 만들 때 탄생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 믿음이 없다면 내가 쓸 수 있는 시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58~59쪽)
- 평생 시를 쓰는 일에 종사하면서 얻은 것은 병이고 잃은 것은 나다. 이 말을 어떤 직업에다 대고 해도 맞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일은 일이다. (95쪽)
-언어가 나오지 않은 순간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다. 아마도 이 고립은 그래서 내 생애를 점령한 것이리라.(181쪽)
-음악가를 질투한다. 음악은 눈을 감아도 들을 수 있다. 글은 눈을 뜨고 읽어야 한다. 눈을 감고도 생각나는 글귀들만이 아마도 음악처럼 살아가지 않을까. 그래서 시에 잠재하는 노래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지 않을까?(204쪽)
-시를 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시는 살아가는 틈과 틈 사이에서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 저절로 솟아나는 힘을 믿었다.( 278쪽)
*시론 중에서
어떤 이도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경험이란 경험하는 주체에 의해 선택된 순간이다. 언제나 나 스스로도 궁금한 것은 어떤 경험은 그렇게 강렬해서 시로 써지면 어떤 경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가 하는 것이다. 답이 없다. 이것은 시선의 문제도 아니다.(359쪽)
다만 나는 인간의 결핍에 관심이 있다. 결핍이 빚어내는 내면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결핍을 인식하는 것이 어쩌면 시 쓰기의 시작일 것이다. (360쪽)
시는 나에게 아무런 답을 하지 않지만 시를 쓰는 시간, 그것 자체가 다만 답이다. 시를 쓸 때마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너의 고아를 혹은 고아성을 계속 간직하고 있는가?(363쪽)
시작 메모 중 특히 ‘쓸쓸함’과 ‘고독’에 대한 그녀의 토로가 가슴을 찔렀다.
- 사물의 정연함. 나는 쓸쓸하다. 어떤 말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지옥 안에서 랭보를 읽는 것은 아직도 내가 젊다는 것을 뜻하지만 쓸쓸해서 이 세상 귀퉁이에 나 혼자만 남은 듯한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 아니라 이기적으로 늙어가는 한 여자의 마음이다. (83쪽)
- 구름 눈 바람 이 많은 것을 시에 집어넣으며 살았다. 철저한 나에 대한 부인이 나를 이끌고 나갔다. 아직 잘 모르겠다. 무엇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내 언어의 가장 선명한 곳에는 쓸쓸함이 있다. (109쪽)
-이제 나이가 들어서 문장을 쓰고 그것 자체만을 즐기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고독으로 죽어갈 것이다. 너의 문장만이 너를 고독에서 구해준다는 걸 네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112쪽)
‘쓸쓸함’과 ‘고독’은 시인이 가져야 할 덕목이었던가. 시는 혼자 있어야 쓸 수 있는 것이니, 그 쓸쓸함과 고독은 어쩔 수 없이 온전히 시인의 것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쓰던 순간, 시는 그녀에게 적지 않은 기쁨 또한 주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꿈꾸는 건 문장을 쓰고 그로부터 파생하는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는 일일 것이다. 그건 아름다운 일이다.”(113쪽)
그녀의 글은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남긴 글들, 혹은 아름다움은 독자들의 가슴에서 새로운 움을 틔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녀는 떠났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바라던 희망이자, 기쁨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에 실린 시들 중 하나를 옮겨본다.
이 시에서 그녀는 누군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 같다. 그 누군가는 그녀의 지인이거나 독자, 혹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아닐까.
안는다는 것
너를 사라지게 하고
나를 사라지게 하고
둘이 없어진 그 자리에
하나가 된 것도 아닌 그 자리에
이상한 존재가 있다,
서로의 물이 되어 서로를 건너가다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종이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