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오민석의 글은 아픈 데를 콕콕 찌르지만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논리적이다. 그의 글은 진짜 논리가 어떤 것인지 확연하게 보여주지만 현학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정연한 아름다움까지 있어서 흡인력이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중앙일보≫ ‘삶의 향기’라는 칼럼에 5년여에 걸쳐 연재한 글들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저번에 읽은 『개기는 인생도 괜찮다』와는 결이 다른 산문집인데, 논리의 깊이가 묵직해서 가볍게 읽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책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경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책은 1부 <바깥을 사유하라>와 2부 <사랑은 의지다>로 되어 있다.
1부에서는 ‘소통’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2부에서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소통과 사랑’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작가는, 독자들이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고, 깊이 있는 사유를 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읽기 쉬운 글은 아니지만 찬찬히 읽다 보면 사유의 비타민을 흠뻑 공급받은 기분이었다. 가끔씩은 이런 비타민 같은 책을 읽어서 멍청해진 뇌에 영양을 공급해주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그는 서문 ‘책을 내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분단 이후 한국 사회는 소위 ‘진영 논리’가 갈수록 심해져서 매체마다 문을 꼭 닫고 자기들의 언어로 자기들끼리만 소통하는 문화가 지배적이 되었다. 이제 ‘이쪽’의 ‘내’가 ‘저쪽’의 사람들한테 말을 거는 것은 서로에게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사회에 가장 긴요한 것은 각 경계(진영)에서 다른 경계에 말을 거는 행위이다.(6쪽)
말 그대로, 요즘은 소통이 아니라 불통의 시대인 것 같다. 진영이라는 말뜻을 찾아보면, ‘서로 대립하는 세력의 어느 한쪽’의 뜻으로 나온다. 이 시대에 화합이 아닌, 왜 대립이 시대의 아이콘처럼 되어버렸을까? 부족한 내 생각으로는 정치인들의 나쁜 ‘의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상대편을 ‘적’으로 규정해버리면 세력을 쉽게 단결시킬 수 있어서 그럴 것이다. 정치에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평범한 개인의 눈으로 보아도, 요즘 사회는 적의로 가득 차 있고, 흉흉한 분위기로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단순한 오해이길 바랄 뿐이지만.
작가는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인용했다.
“경계 너머로 자신을 계속 추방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눈에는, 사회의 리더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경계 너머로 자신을 계속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 너머의 타자들을 계속 배척하고 추방하고 있는 것이, 현실로 보인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작가는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경계를 넘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경계가 마주치는 공간에 다다른다. 그곳이야말로 언어와 생각이 섞이는 곳이고, 사상과 실천이 맞부딪치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우리’ 동네에서만 사용하는 방언을 버려야 한다. ‘다른’ 동네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건드릴 때에야 비로소 경계가 무너지고 섞여야 할 것들이 섞인다. 훌륭한 집단 지성은 그런 ‘섞임’의 공간에서 만들어진다. (7쪽)
-자기들만의 방언을 버리고 ‘섞임’의 공간에서 공통의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때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쪽 편과 이쪽 편을 나누고, 각각의 진영을 만들어 자기들과 다른 것은 적으로 공격하는, 자기들만의 동질성 주장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분석은 가슴을 시원하게 뻥 뚫어주는 듯했다.
동질성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는 공동체 내의 다양한 주장들을 철저히 배제했으며, 통합과 단결의 이름으로 ‘다른 목소리들’을 억압했다. 랑시에르(J.Rancière)에 의하면 ‘일치(consesus)’는 정치가 아니라 ‘치안(police)’이다. 그에 의하면 정치란 ‘불일치(dissensus)’를 생산하는 것이고, 다른 견해들 사이의 충돌로 공공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지난 세월에 경험했던 국민 통합은 사회적 ‘동의’가 아니라, 치안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화합’의 이름으로 위장된 가장 큰 ‘분열’과 갈등을 경험했다. 서로 다른 견해들인 공공 영역에서 자유롭게 부딪치는 것, 그리하여 ‘유쾌한 상대성’이 살아나며, 합당한 과정을 거쳐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42~43쪽)
-현실에 있어서, 동질성이라든가 일치라는 것은 자유가 아닌 억압인 경우가 많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유쾌한 상대성’이 보편적인 진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방은 절대적으로 틀렸다’, 라는 사고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누가 옳고 그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것이 절대선絕對善인가? 절대선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공통의 언어로 진심 어린 소통을 통해서 얻은 합의가 진정한 의미의 선善일뿐이라고 생각한다.
2부에서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사랑에도 두 가지 층위가 있다. 개인적 사랑과 사회적 사랑이 그것이다. 사랑은 이 두 층위를 가로지르며 배열되고 조합된다. 이들은 서로 길항(拮抗)하고 보충하며 완성을 향해 간다. 이 중 어떤 것이 배제될 때, 사랑은 힘을 잃거나 위험한 에너지로 전락한다. 사랑은 관계의 확산이고, 확산은 늘 ‘공통적인 것’을 향해 있다. 합하여 공통적인 것을 두루 잘 만들어가는 개체들이 진정한 사랑의 주체들이다.(181~182쪽)
-사랑 역시, 소통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관계의 확산은 ‘공통적인 것’을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한 일이다. “합하여 공통적인 것을 두루 잘 만들어가는 개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랑꾼들이 아닐까.
작가는 사랑은 관계의 언어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재발명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랑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의지’의 문제라는 것. 그러므로 사랑을 위해서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을 거저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랑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어느 날 사랑이 갑자기 우리에게로 뚝 떨어지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다. 그런 사랑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끝나기 쉬울 것이다.
레비나스가 “신앙이란 신의 존재 혹은 비존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가 없는 사랑이 가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사랑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사랑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대부분 서툰 사랑 때문에 헤매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끊임없이 재발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재발명은 논리가 아니라 타자의 상한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랑은 관계의 언어이다. 관계는 연쇄적이므로 망가진 사랑은 파괴의 연쇄를 가져온다. (186쪽)
진정한 소통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각자의 혼잣말이 아닌, 공통의 언어가 필요하다. 그만큼 언어가 중요하다. 언어의 힘에 대한 작가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하며 글을 맺는다.
모든 관계에 언어가 개입된다. 생각과 사상의 느낌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언어의 외피를 입을 때 비로소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 막말로 언어 없이 사상도 없으며, 표현할 수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