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지음/자음과 모음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책 제목이 ‘혁명적’이어서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다. 제목은 파울 첼란의 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일본 철학자인 사사키 아타루이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는 현재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다고 했다. 제목과 작가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책에 관한 이야기를 닷새 밤에 걸쳐서 한다. 그것도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그가 말하는 ‘독서의 묘미’는 이런 것이다.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것은 본질적인 난해함이나 무료함이지, 결코 난해한 체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이 나쁜 것도 아니며 재미있게 읽을 수 없는 자신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립니다. 정당하게도 어딘가에서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모르는 것처럼 검열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독서의 묘미’가 되는 것입니다.(42~43쪽)
우리는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든 책을 만날 때, 그 책을 덮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런데 저자는 오히려 이런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며 오히려 이런 데서 독서의 묘미가 있다고 했다. 그는,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욕구를 극복하기 위해서 책을 반복해서 읽으라고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知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정보로서 읽는다면 괜찮겠지만, 그것이 과연 ‘읽는다’는 이름을 붙일 만한 행위일까요. 그렇게 정보로 환원되는 것밖에 상대하지 않으니 당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44쪽)
그의 이러한 생각은 기존의 독서방식을 시원하게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독서에서 있어서는 다다익선 多多益善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책은 결국 어떤 한 가지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권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책을 반복해서 읽으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생각해보면 책들은 ‘어떤 진실’의 무한 변주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굳이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신에 깊이 있는 독서를 해야 한다는 것.
저자는 문학이 혁명의 본질이며, 읽는 것, 다시 읽는 것, 쓰는 것, 다시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대혁명이란 성서를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75쪽)
그는 루터의 대혁명이라는 것이 책을 읽는 데서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이 곧 혁명이며, 그 혁명은 반복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종종 ‘문학은 끝났다’라고 하는데 대한, 그의 반응은, ‘창피하니까 그런 말은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그는 문학이 발명된 지 고작 5000년밖에 되지 않았다며, 문학은 이상할 정도로 젊은 예술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에 출현했던 위대한 인물들이 미래에 다시 출현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며,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극소의, 그러나 절대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거는 것. 그것이 우리 문헌학자의 긍지고 싸움이다.(299)
사사키 이타루의 화법은 아주 특이해서 처음에는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
그는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의 것이 아니면 일류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까지 했다. 그가 읽을 만한 책을 이런 식으로 규정해버리니, 독자로서는 좀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저자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을 읽을 때 가동되는 방어기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책 전반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결국 작가가 닷새 밤 동안 말한 것의 요지는, 문학이 혁명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는 행위가 새로운 세계, 즉 혁명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문학에 대한 열정에 압도되었다. 그래서일까, 새삼 읽는 것과 쓰는 것의 강력한 힘을 느꼈다.